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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 로스앤젤레스의 시가를 빠져나와 샌디에이고 프리웨이에 들어서자, 주말을 즐기려는 차량의 행렬이 꼬리를 물고 있었다.
롱비치를 지나, 가든 글로브 프리웨이와의 분기점에 이르러서야 자동차의 물결은 다소 적어졌다. 하늘은 여전히 찌푸린 듯한 회색이었지만 프랭클린과 페리스는 저마다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 크게 기대를 걸고 있기까지 했다.
“어때, 이 좋은 공기. 역시 자네를 데려오길 잘 했지.”
프랭클린은 필요 이상으로 천천히 차를 운전하면서 옆에 앉은 페리스에게 말을 걸었다.
“자네도 별장을 한두 개 가지는 게 어때? 그래도 베스트셀러 작가가 아닌가.”
“응. 나도 생각은 많지만,
 여러 가지 코앞에 닥친 일에 쫓기다 보니 그런 것은 무의식중에 나중으로 미뤄지더라구.”
“여전하시군. 우선 집만 하더라도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의 옛집 그대로가 아닌가. 환경의 변화라는 것도 작가의 성장을 촉진하는 요인의 하나가 되지 않을까?”
“그럴까? 나는 마찬가질 것 같은데.”
“저것 보라구! 자기 위치는 바꿔 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야. 자네도 새로운 일을 하고 싶거든 자네 자신을 좀 더 적극적으로 바꿔보는 게 어때.”
“나로선 판단이 잘 서지 않는군.”
“그러니까 문제야, 돈을 쓸 줄 모르는 녀석은. 다시 말해서 말이야, 좀 더 마음이나 몸을 풍요하게 해야 해. 자네도 그렇게 하면 훨씬 더 폭넓은 사람으로 성장하게 돼요.”
프랭클린은 한껏 교만하다 못해 스스로 도취되어 있기까지 했다. 옛날부터 두 사람 사이의 주도권은 자신이 지니고 있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더욱 우쭐해져 있었다.
어쨌든 이 녀석의 미래는 내 손아귀에 들어 있는 거나 다름없어. 원래 녀석은 내가 아니었더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촌뜨기가 아닌가.
콤비를 해체하고 새로 독립을 하겠다고? 미스터리가 싫어졌다고? 웃기고 있네, 도대체 누구 덕택에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는데?

네겐 하찮은 트릭이나 싸구려 심리묘사 따위나 제격일 뿐이야. 그런 싸구려를 대중에게 먹힐 수 있도록 요리한 게 누구냔 말이야.

저 혼자서 대가가 된 체하다니, 너무 잘난 체하지 말아줘, 짐 페리스!
“앞으로 얼마나 더 가야 돼?”
페리스의 말소리가 프랭클린의 부풀어 오를 대로 오른 자부심을 가로막았다.
“한 시간 정도밖엔 남지 않았어. 샛길로 갈 거니까.”
그래, 앞으로 한 시간 정도야. 기대해 보시라고.

프랭클린의 입술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예의 초승달을 만들고 있었다.


주위의 푸르름이 한층 더 짙어지고, 길 양편으로 늘어선 침엽수는 점점 경사가 지면서 호수를 향하고 있었다.

머레이호(湖)를 둘러싼 숲 속 여기저기에 갖가지 색깔의 지붕이 보일락 말락 하고, 때때로 멀리 머리 위를 지나가는 희미한 제트 여객기 소리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아 마치 소리하고는 인연을 끊은 듯한 별천지가 거기에 있었다.
길은 호수를 돌면서 차츰 폭을 좁혀 갔다. 그에 비례해서 오고 가는 자동차의 숫자 또한 훨씬 줄어들고, 대신 수목만이 더욱 무성해지고 있었다. 길옆으로는 인가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도로에서 갈라져나간 샛길의 훨씬 저편에, 그것도 모두 호수 근처에 아담한 별장들이 가끔씩 눈에 띌 뿐이었다.
프랭클린이 운전하는 메르세데스는 높다란 언덕 위로 올라갔다. 전망대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높은 그 언덕 위에는 몇 그루의 전나무에 둘러싸인 조그만 오두막 같은 가게가 있었는데, ‘라 상카 잡화점’이라고 적힌 간판이 달려 있었다.
중고 웨곤이 가게 앞에 한 대 정차해 있을 뿐, 부근에서는 사람의 그림자를 찾아볼 길이 없었다. 프랭클린은 그 웨곤 곁에 차를 세웠다.
“잠깐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음료수라도 사 와야겠어.”
차에서 내려선 그는 반사적으로 문을 닫더니 다시 돌아서서 창문 안으로 목을 들이밀고 말했다.
“자네 뒤에 책이 있을 거야. 그것 좀 집어 주겠나?”
“우리가 쓴 책 아냐?”

페리스가 그것을 건네주며 말했다.
“맞아. 이 가게 아줌마가 우리 팬이야. 전부터 달라고 졸랐었거든. 벌써 나이든 아주머니지만.”
“나도 같이 갈까?”
“뭐, 금방이면 되는데, 그냥 앉아 있지 그래.”
프랭클린은 그를 만류하고는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 안에도 사람의 그림자는 없었다. 갖가지 인스턴트식품, 낚시도구, 커다란 유리병에 든 캔디 종류들, 알록달록한 색깔이 모자, 각종 주류와 음료수들… 통나무를 그대로 이용하여 묘하게 짜 맞춘 건물과, 진열된 물건들이 들쭉날쭉 난잡하게 쌓여 있어서 이 집주인의 성격을 짐작하게 해주고 있었다.
“라 상카 부인, 손님 이예요!”
프랭클린은 어두컴컴한 가게 안쪽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그곳에는 손님용 화장실과 공중전화가 있고 더 안쪽으로는 라 상카 부인의 방이 있다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지금 나가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캔디가 든 커다란 유리병을 끌어안은 라 상카 부인이 나타났다. 흰 바탕에 커다란 빨간 꽃이 총총히 박힌, 마치 자루와도 같은 드레스. 빨간 고리모양이 귀걸이를 야만스럽게 늘어뜨린 그녀는 프랭클린을 보자 억지웃음을 웃어 보였다.
“저런! 우리 작가 선생님 아니세요. 손님이니 뭐니 하기에 난 또 누군가 했죠.”
프랭클린은 이 중년의 미망인이 뭔가 기회만 있으면 자기에게 유혹의 손길을 뻗쳐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별장을 손에 넣은 지 지금껏 그는 각양각색의 여자를 이곳으로 끌고 왔었다. 그녀는 그런 그의 복잡한 여자관계가 마음에도 걸리지 않은 듯 점점 더 노골적으로 되어갔다.
미안하지만 라 상카 부인, 당신은 내가 좋아하는 타입이 아냐. 당신과 난 너무 격이 다르다구. 지금 난 잠깐만, 그것도 아주 잠깐만, 당신을 필요로 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착각해서는 곤란해요.
“아무튼 손님임엔 틀림없잖습니까. 자, 이거 작은 거지만 받아두세요.”
그는 가지고 온 책을 카운터 너머로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부인의 눈이 기대에 반짝이고 약간 뻐드렁한 앞니를 드러내고 웃었다.
“어머, 제게요?”
“물론이죠. 전부터 달라고 졸라대시던 거예요.”
“짐 페리스, 캔 프랭클린 콤비의 <멜빌 부인 시리즈>라.”
그녀는 겉표지에 인쇄된 글자를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속표지를 들춰 보세요.”
거기에는 그의 사인과 ‘나의 릴리에, 애정을 담아서’라는 말이 씌어 있을 것이다. 그것을 찾아낸 그녀는 소녀처럼 소리를 질렀다.
“아이, 좋아라!”
그녀는 프랭클린에게 교태어린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욕심 같아서는 책보다도 작가 선생님을 더 갖고 싶은 걸요…”
이것 봐라, 이젠 아예 본색을 드러내는군, 그래. 하지만 당신 같은 건 딱 질색이야. 당신에겐, 무언가 심심풀이를 찾아 헤매는 떠돌이 녀석쯤이 안성맞춤이겠지.
“그래요? 다음에 더 좋은 기회가 있겠죠. 오늘은어서 이 물건들이나 챙겨 줘요.”
그는 구입할 물건의 리스트를 라 상카 부인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녀는 그것을 읽으면서 심술궂게 그를 빤히 쳐다보면서 말했다.
“말로만 그러셔…”
“글쎄, 두고 봐야죠.”
프랭클린은 그렇게 말하고는 페리스가 기다리고 있는 쪽으로 눈을 돌렸다. 라 상카 부인도 카운터에서 몸을 앞으로 내밀면서 차 쪽을 살펴보고 있었다.
“이봐요, 오늘은 또 어떤 아가씨죠? 빨간 머리? 블론드?”
“무슨 소릴! 오늘은 나 혼자예요. 조용히 혼자서 생각도 좀하고 낚시도 좀 할까 싶어요.”
그는 지갑에서 10달러짜리 지폐를 꺼내 그녀에게 주면서,
“돈이 좀 남겠죠? 전화를 걸려는데 잔돈이 좀 필요해요.”
“고마워요.”
부인은 금전 등록기에서 동전을 꺼내 프랭클린에게 건네주었다.
프랭클린은 자꾸만 바깥쪽을 기웃거리는 라 상카 부인은 개의치 않고 안쪽에 있는 공중전화 쪽으로 걸어갔다.

 

교환이 나왔다.
“아, 로스앤젤레스까지 장거리 부탁합니다. 번호는 213-2003…”
짐 페리스의 자택을 불러내는 소리가 한참 동안 계속되더니 이윽고 “여보세요, 여보세요.” 하고 대답하는 여자 목소리가 프랭클린의 귀에 들어왔다.
“죠안나? 저예요, 캔.”
순간 말소리가 끊겼다. 한참 있다가 페리스 부인인 죠안나의 목소리가 겁먹은 듯이 들려왔다. 약간 기분이 언짢은 것 같았다.
“웬일이시죠? 짐 하고는 절교하신 거 아녜요?”
“한때 다투긴 했지만 그 동안 저도 많이 반성했어요. 사무실에 들러 짐하고 얘기를 하고 왔어요. 나도 약간 점잖지 못했던 것 같아요. 지금 와서는 그의 전도를 축복하고 싶은 기분인 걸요. 정말이에요.”
“그럼, 화해하신 거군요? 잘되셨네요.”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요. 당신도 알다시피 그와 나는 십년지기가 아닙니까. 친구라기보다는 형제나 다름없는 사이죠. 이번 일도 그러고 보면 형제싸움 같은 거예요. 화해했다는 이야길 짐한테 아직 듣지 못하셨나 보죠?”
“네.”
“그럼, 짐에겐 아무 말 말고 잠자코 계세요. 돌아가서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은 모양이니까.”
“알겠어요. 그럼, 화해하신 기념으로 오늘밤 같이 식사하시는 게 어때요?”
“네, 그렇게 하고 싶지만 실은 주말을 샌디에이고 별장에서 보낼 계획이거든요. 벌써 여기 와 있는 걸요.”
“그럼, 언제 근간에 다시 연락 주세요.”
“그러죠. 그쪽에서 연락을 할 만한 일은 별로 없겠지만 별장의 전화번호는 메모해 두셨겠죠?”
여기가 중요한 대목이야, 하고 프랭클린은 자신에게 다짐했다. 만약 그녀가 적어놓지 않았더라도 될 수 있는 대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메모를 시키는 거야.
“네. 알고 있어요.”
됐다. 이것으로 만사 오케이다.
“그럼, 돌아가면 연락드릴게요. 안녕히 계세요.”
수화기를 놓은 프랭클린의 얼굴에는 득의의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지금까지는 모든 것이 완전히 각본대로 진행 중 이었다.

계획된 범죄행위에는 언제나 예상 밖의 일이 벌어지기 마련이라지만, 이 캔 프랭클린의 신중성 앞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날 턱이 없다구. 모든 것을 포석대로만 하면 정말 감쪽같을 거야. 하지만 어쨌든 안전운행을 해야 해.
프랭클린은 다시 한번 자신에게 다짐하면서 가게에서 나왔다.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드는데?”
페리스가 운전하고 있는 프랭클린을 향해 중얼대듯이 말했다. 차는 라 상카 잡화점이 있는 언덕을 내려와서 꾸불꾸불한 길을 따라 더 앞으로 나아갔다. 어느새 하늘은 말끔히 개어 있고 호수는 5월의 태양빛을 눈부시다는 듯 반사해 내고 있다.
“뭐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
무언가 눈치를 챈 걸까? 그럴 턱이 없을 텐데. 프랭클린은 전방의 길을 응시하면서 아무렇지 않은 듯이 물어 보았다.
“옛날에 여길 한번 왔던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
“정말로 왔었어?”
“아냐, 가끔 있잖아, 왜 그런 일이. 뭔가 그 착각이란 거…”
살았구나, 난 또 무슨 소린가 했지… 프랭클린은 내심 안도의 숨을 쉬었다.
“자넨 역시 조금 지쳐 있군. 과로란 말일세.”
“어쩜 그럴지도 모르지. 어쨌든 미스터리 아닌 다른 작품을 쓸 생각하면 묘하게 흥분이 돼. 한편으론 너무 분별없는 일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하지만 말이야. 정말 작품다운 작품을 쓰겠다고 작정하고 보니 어쩐지 잠도 제대로 오지 않고…”
“마치 어린애나 다름없군.”
“그래. 요즘의 내 심경은 철딱서니 없는 어린애, 그대로야.”
페리스는 프랭클린의 표정을 눈 여겨 살피면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나는 그렇다 치더라도 자넨 어떡할 셈인가?”
어떡할 거냐구? 별 걱정을 다 하는군, 그래. 내 걱정은 그만두고 자네 앞길이나 잘 살펴 가게나, 짐 페리스!
“글쎄, 어떡할까? 어쨌든 한동안은 푹 좀 쉬고 볼래. 자네나 마찬가지로 나도 지금 당장은 먹고 사는 데 지장은 없으니 말아야. 게다가 난 자네와 달라서 노는 거라면 결코 남에게 뒤지지 않지 않은가.”
“우리들의 멜빌 부인은 어떻게 할 셈이야?”
“이것 보게나, 자넨 벌써 그녀하고는 손을 끊었지 않은가. 그런 생각일랑 벽장에 처박아두고 새 작품에나 힘을 써요.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쓰는 데는 별로 소질이 없으니까 혼자서 그 시리즈를 이어갈 순 없을 거야. 하지만 독자들이 계속 요구해 댄다면 언젠가는 누구하고 손을 잡고 새로운 <멜빌 부인 시리즈>를 계속해도 좋겠지. 옛날의 우리들처럼 재능 있는 작가들이 할리우드에는 우글대고 있으니까. 그리고 또, 자네의 신작이 실패한다면 나와 다시 손잡고 일하고 싶은 생각이 일어날지도 모르잖아?”

그렇게 말하면서 프랭클린은 힐끗 페리스 쪽으로 눈길을 보냈다.
“미안한 일이지만 설사 실패하더라도 내가 다시 추리물에 손을 대는 일은 없을 거야.”
예상했던 대로의 대답이었다.

이것으로 모든 것은 결정이 된 거다. 이젠 어떠한 변동도 있을 수 없어.
“오해하지 마. 내가 미련을 갖는 건 자네에 대한 우정의 소치야. 진심을 말한다면 나 역시 멜빌 부인은 이것으로 끝장을 내고 싶어.”


캔 프랭클린의 별장은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에 세워져 있다.
깎아지는 듯이 높이 솟은 지붕, 우거진 전나무 숲에 둘러싸여 그림처럼 멋지게 들어앉은 그 별장은, 프랭클린이 1년 동안이나 고르고 고르다가 선택했을 만하다는 생각을 절로 들게 할 정도였다.
차는 옛날 런던의 가스등을 본 따 세운 도로 양쪽의 기둥 사이를 지나 별장 앞마당에 멈춰 섰다. 높이 솟은 전나무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과 새들의 지저귐뿐, 한적하기 짝이 없는 별세계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꽤나 무드 있는 곳일세 그려!”
페리스는 호수를 바라보면서 감탄을 거듭했다.
“ 우리들의 책이 날개 돋친 듯이 팔린 덕분이지. 멜빌 부인이 안겨준 선물인 셈이야. 내부도 그런대로 괜찮아. 자, 들어가자구.”
프랭클린은 가게에서 산 꾸러미를 페리스에게 맡기고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생나무 향기가 집안으로부터 풍겨왔다. 왼쪽에는 커다란 벽난로, 오른쪽에는 호화스러운 바아, 정면 오른쪽으로는 호수가 바라보이는 창이 길게 누워있었고, 바닥에는 발목까지 빠질 것 같은, 차분한 빛깔의 융단이 깔려 있었다. 가죽으로 된 소파에는 아직도 투명비닐로 된 커버가 씌워져 있어서 그것만이 이 방의 분위기를 이상하게 깨트리고 있었다.
“무리도 아니구만.”
입구에 선 채 페리스가 중얼거렸다.
“뭐가 말인가?”
“여자애들이 줄줄이 녹아났던 게 말이지. 침실은 2층인가?”
“난 또 무슨 말이라고! 하지만 여자애들이 서슴지 않고 날 따라 나섰던 건 이런 무드 있는 곳이 기다리고 있으리라고 미리 알고 그런 건 결코 아닐세. 어때, 한잔할까?”
붙박이 바아 위에다 라 상카 상점에서 사온 봉지를 올려놓으며 프랭클린이 말했다. 페리스는 소파의 비닐 커버 위에 앉으면서 황급히 손을 저었다.
“알코올에 절일 작정이라면, 난 일찌감치 손들겠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럼, 이런 데까지 와서 도대체 뭘 하겠다는 거야.”
프랭클린은 두 개의 글라스에 제멋대로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
“자, 괜찮아. 한잔 하라고.”
“응…”
페리스는 마음이 내키지 않다는 듯 손을 뻗쳤다.
“하하, 부인 생각을 하고 있는 게로군.”
프랭클린이 말하자 페리스는 눈이 부신 듯한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어쨌든 갑자기 와 버렸거든. 지금쯤 나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거야.”
“바보 같은 소리! 자네도 구제 불능이야. 그렇게까지 마음 쓸 필요가 어디 있나. 전화로 한 마디 해두면 그만일 텐데.”
“뭐라고 변명을 하느냔 말이야?”
페리스의 그런 심리는 프랭클린이 이미 예상했던 바였다.

작품에 관해서야 어떨지 모르지만, 현실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언제나 우유부단하기 짝이 없는 페리스였다. 그런 까닭에 프랭클린은 언제나 주도권을 쥘 수 있었으며, 그것은 지금 이 시간에도 변함이 없었다.

그렇게 심성이 약한 이 친구가 도대체 무슨 꿍꿍이속이 있어 혼자 독립해서 순수소설을 쓰고 싶다고 말을 꺼내는 걸까. 이것만은 프랭클린으로서도 전혀 풀 수 없는 수수께끼였다.
“아이구, 맙소사! 착실한 사람은 이래서 곤란하다구! 이봐, 이렇게 말하는 거야. ‘사무실에서 일을 해야 해. 마감에 늦을 것 같아서 그래. 미안하지만 오늘 밤 데이트는 다른 날로 연기해 주지 않겠어?’… 자네도 이런 전화 정도는 평소에도 부인에게 했을 거 아냐?”
“그 정도야 자주하는 셈이지.”
“그럼 도대체 무얼 망설이나?”
“하지만…”
페리스는 눈앞의 작은 탁자에 놓여 있는 전화기를 지켜보면서 또 생각에 잠겨 있다.
“거짓말하는 것이 마음에 걸려서…”
정말 바보 같은 녀석이군! 프랭클린은 점점 화가 치밀어 올랐다.

모든 것이 예상대로 착착 진행되어 가는 중인데도 이렇게 화가 나다니… 프랭클린은 참아내기가 어려웠다.
“그만 좀 적당히 해두라구. 자넨 이미 여기에 와 있지 않은가. 이제 와서 어떡하겠다는 건가? 잠자코 부인을 기다리게 한다는 것은 더 더욱 미안한 일이 아닌가.”
“알았어.”
페리스는 그제야 결심이 선 듯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프랭클린이 그에게 등을 돌리고 주머니에서 슬쩍 권총을 꺼내 실린더에 총탄을 장전할 때였다. 페리스의 목소리가 프랭클린의 귓전을 때렸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전화국입니까? 장거리 전화를 좀…”
프랭클린이 후다닥 전화기에 달려들어 끊어 버렸다. 이 바보 같은 녀석이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왜 이래?!”
페리스가 화를 냈다.
“미스터리 작가인 자네도 실생활에 있어선 상상외로 아둔하군. 저쪽에서 부인이 나왔을 때 교환수가 ‘장거리 전홥니다’하고 연결을 하면 당장에 탄로가 나고 말 게 아닌가.”
“그럼 어떡하면 좋지?”
“여기선 로스앤젤레스가 직통으로 연결돼요. 먼저 02를 돌리면 말이야.”
페리스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다시 한번 수화기를 집어 들고 다이얼을 돌리기 시작했다.

프랭클린은 그것을 확인하자, 재차 그에게 등을 돌리고 다시 탄환을 재기 시작했다.
“죠안나? 나야.”
페리스가 말했다.
“지금 뭘 하고 있어? … 응, 실은 그것 땜에 전화 걸었어. …아직 사무실에 있어. 저 오늘밤 안으로 다 쓰지 않으면 마감에 늦게 돼.”
프랭클린은 권총을 단단히 쥐고 소파에 앉아 있는 페리스를 향해서 돌아섰다. 총구는 그의 머리를 겨냥하고 있다.
이번에야말로 실린더엔 총탄이 들어 있었고, 손가락은 어김없이 방아쇠에 걸려 있었다. 이번에는…
“알고 있어. 미안해. 다음부터는…”
페리스는 모든 것이 제 탓이라는 듯 원망스러운 시선으로 프랭클린의 모습을 찾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를 노리고 있는 총구를 발견했다.
그의 눈은 놀라움으로 휘둥그레졌다. 무언가 말을 하려고 그가 입을 벌리는 순간 탕하는 소리와 더불어 총탄이 그의 머리를 관통했다. 비닐커버 위에 새빨간 피가 어지럽게 흩어지고, 수화기는 융단 위로 나뒹굴었다.

프랭클린은 침착한 발걸음으로 시체에 다가가, 몸을 구부리고 수화기를 집어 들어 귀에 댔다.
페리스!”
죠안나의 히스테릭한 소리가 페리스를 계속 부르고 있었다. 그것을 확인하고 나서 프랭클린은 전화를 끊었다.
계산했던 대로, 페리스의 혈액은 비닐커버 위에만 묻었다. 프랭클린은 다른 곳에 피가 붇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하면서, 시체를 비닐커버로 둘둘 싸서 준비해 두었던 끈으로 그것을 묶었다. 그리고는 끙끙거리며 겨우 시체를 밖으로 끌어냈다.

말로는 많이 들어왔지만, 시체가 상상이상으로 무겁다는 것을 그는 이때 처음으로 알았다. 인적이 없는 곳이기 때문에, 목격당할 염려는 전혀 없었지만, 그래도 그는 신중에 신중을 거듭했다.
이윽고 집안으로 돌아온 그는 페리스가 가지고 있었던 글라스를 조심스럽게 닦아서 지문을 지웠다. 다음엔 전화기, 작은 탁자, 그리고는 만약을 생각해서 문의 손잡이도 말끔히 닦아 냈다. 이제 짐 페리스가 이곳에 왔었다는 증거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게 된 셈이다.
그는 글라스에 위스키를 따라 천천히 핥으면서 방안을 둘러보았다. 따스한 5월의 햇빛은 이미 서쪽으로 기울어 있어 참극이 있었던 소파를 부드럽게 비춰주고 있었다. 멀리서 새가 지저귀고 있었다.
얼마 안 있으면, 죠안나 페리스로부터 전화가 걸려올 것이다. 그것은 절대로 걸려오지 않으면 안 되며, 그것을 받지 못한다면 그는 여기서 움직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는 지금 그 전화를 기다리고 있다.
정적이 흘렀다.

기분이 이상해질 정도로 완전한 정적이었다.

이 집을 산 이래 단 한번도 혼자 지내본 적이 없는 그를 새삼 놀라게 하는 정적이었다.

혼자만이 고즈넉이 지키고 앉아 있는 그 정적이 그로 하여금 잊어버리고 있었던 공포를 다시 생각나게 했다.
그렇다, 나는 방금 사람을 죽인 것이다.

지금까지 그런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있다가 이제야 생각난 것처럼 그는 내심 소스라치게 놀랐다.

물론 후회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는 그것이 묘한 기쁨마저 느끼게 했다. 그러나 이 정적 속에 찾아든 공포감만은 계산 밖이었다. 도대체 이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정적이란 무엇인가. 소리가 없다는 것이다.

소리가 없다는 것은, 소리를 내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소리를 내는 것? 새가 있지 않은가. 바람이 있지 않은가.

아니야, 그런 것이 아니야. 소리, 소음, 말소리… 사람.

그렇다, 사람이 없는 것이다.


“제발 부탁이야. ‘멜빌 부인’을 계속 써주게나, 짐!”
또 한 사람의 프랭클린이 소리를 지르고 있다.
짐 페리스는 그에게 등을 돌린 채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부탁이야, 손을 떼지 말아줘!”
또한 사람의 프랭클린이 다시 소리쳤다.
페리스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짐, 뭐라고 한마디 해주면 어때. 제발 대답 좀 해줘.”
또 한 사람의 프랭클린이 우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러나 페리스의 뒷모습은 완강한 침묵으로 굳어져 있었다.
“짐 페리스!”
또 한 사람의 프랭클린은 거의 절규에 가까운 소리로 애원했다.
“제발 부탁이야. 대답 좀 해줘!”
침묵이 계속 되고 있었다.
“짐!”
침묵.


사람이 없기 때문의 공포감? 프랭클린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내가 살인하는 장면을 오히려 남에게 들키고 싶었던 게 아닐까? 캔 프랭클린은 이렇게 짐 페리스를 죽였습니다, 하고 오히려 큰 소리로 외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정적, 사람 소리, 살인, 페리스, 프랭클린, 멜빌 부인, 권총… 그렇다, 나는 마침내 해내고 말았어.
숨이 막힐 듯한 압박감이 그를 엄습하기 시작했다. 방이, 의자가, 집이, 그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릴 듯한 그런 공포가 그에게 덮쳐왔다. 프랭클린은 정신없이 별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여 물고는 깊이 빨아들였다. 별장 바깥의 나무로 된 손잡이에 몸을 기대고, 눈 아래 펼쳐지는 호수를 바라다보고 있으려니 겨우 침착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바보 같은 자식, 캔 프랭클린. 이젠 너를 방해할 사람은 없어졌다. 이제 남은 건 마지막 마무리만 남아 있을 뿐이 아니냐. 그렇게 되면 모든 게 깨끗이 끝나는 거야. 우리들의 멜빌부인의 영광도 이젠 나의 것이 되는 거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안에서 전화가 울리고 있었다. 황급히 달려갔다.

벌써 한참 전부터 울고 있었던 게 아닐까? 끊지 말아다오. 제발, 끊지 말아다오. 이것을 받지 못하면 지금까지의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다.
프랭클린은 자기의 방심을 저주하면서 힘껏 뛰었다. 덤벼들 듯이 수화기를 집어 들었더니, 전화는 아직도 이어져 있었다.
죠안나 페리스의 겁먹은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죠안나?”
그는 가쁜 숨을 조절하면서 될수록 침착하게 말했다. 그녀의 이야기는 상상했던 대로였다.
“뭐라고요?”
그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그렇게 대답했다.

잘한다, 캔 프랭클린. 그런 식으로 해야 해. 너는 할 수 있단 말이야, 걱정일랑 집어치워.
“이봐요,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한번 말해주지 않겠어요? … 틀림없는 일인가요? … 경찰에는 벌써 알렸나요? … 아, 그야 가고말고요. 곧 그리로 갈게요.”
물론, 곧바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당신이 이렇게 계기를 만들어 주지 않았는가, 죠안나.
“이봐요, 죠안나. 침착해요. 걱정하지 말고… 그것 틀림없이 무슨 농담일 거예요. 너무 애쓰지 마세요. … 예, 알았어요. 곧 갈 테니까요. …그럼.”
프랭클린은 먼저 전화를 끊었다. 조금 전의 불안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글라스의 위스키를 단숨에 마시고 나서 마지막 마무리를 하기 위해 별장을 나섰다.
멀리 호수 수면 위로 엷은 구름이 천천히 지나가면서 날이 저물기 시작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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