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 콜롬보<상류로 오르는 비탈길>

 

W.링크/R.레빈슨지음

 

 

 

제1장 두 사람의 추리작가

 

 

1

 

캔 프랭클린은 자동차 엔진을 끈 뒤 준비한 권총을 꺼내 들었다. 실린더 속은 다시 볼 필요도 없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걸 다시 한번 확인하고 주머니에 넣었다. 권총을 사용하는 것은 그가 좋아하는 방법이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피를 보는 것을 아주 싫어해서 추리작가답지 않다는 말을 자주 들어온 터였다.

그러나 이번만은 이것이 필요했다. 권총을 들이댔을 순간의 짐 페리스의 얼굴을 상상하면 이상하게도 가슴이 두근거리곤 했다.

차에서 내리자, 셔먼 엔터프라이즈 빌딩이 잿빛 하늘을 배경으로 프랭클린의 머리 위를 내리 덮칠 듯이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프랭클린은 높은 장소를 좋아했다. 두 사람의 공동 사무실을 이 빌딩의 맨 윗 층으로 정한 것도 그였다. 쳐다보는 것보다는 내려다보는 쪽을 더 좋아했던 그는 동업자의 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사무실을 이곳으로 정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 사무실은 어느새 공동소유가 아닌 페리스만의 성이 되어 있었다.
그가 밑에서 쳐다보고 있는 지금도 페리스는 확실히 그곳에 성주로서 군림하며 과거 두 사람의 영광에 둘러싸인 채 일을 하고 있을 것이었다. 프랭클린의 표정은 굳어졌다.
“좀도둑 같은 녀석…”

프랭클린은 메르세데스 벤츠의 뒷자리에서 준비해 온 샴페인을 집어 들더니 뒷문으로 해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복도에서 서성거리며 사무실 쪽을 향해 귀를 기울이니 쉴 새 없이 타이프라이터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페리스가 단 혼자 있으리라는 것은 평소 그의 습관으로 확인해 볼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가볍게 문을 노크했다.
타이프라이터 소리가 뚝 그쳤다. 그러나 그것은 곧 다시 들려왔다. 프랭클린은 다시 한번 이번에는 좀 더 세게 두드렸다.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문이 열리고 짐 페리스의 불쾌스러운 듯한 얼굴이 나타났다.

“여…”

페리스는 말을 이으려다가는 프랭클린의 권총을 보더니 눈을 휘둥그레 떴다. 총구는 그의 얼굴 한 가운데를, 정확하게 말해서 두 눈 사이의 한가운데를 겨누고 있었다. 페리스의 입은 어이없다는 듯이 열린 채였다. 그러나 그것도 불과 한순간이었다.

그는 다시 문제의 불쾌스러운 얼굴로 되돌아가 있었다.

“이러지 마, 캔.”

그러나 프랭클린은 계속 권총을 들이댄 채 태연하게 서 있었다. 나이에 비해 주름살이 거의 없는, 마치 어린이가 그대로 어른이 된 것과 같은 프랭클린의 이상한 얼굴이 거기 있었다.

“장난 좀 집어치워. 이래봬도 우린 베스트셀러 작가에다 추리작가가 아닌가?”

“그게 어떻다는 거야?”

페리스는 타이프라이터 쪽을 잠깐 돌아보고는 미간을 의식적으로 찌푸렸다.

“무엇보다도 자넨 장갑을 끼고 있지 않아. 방아쇠에 손가락도 걸고 있지 않고.”

프랭클린은 얇은 입술을 초승달 모양으로 다물었다. 그것은 그의 독특한 웃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말야. 실린더 속이 텅텅 비어있지 않나?”

프랭클린은 껄껄 웃었다.
이것 봐라, 이 녀석도 뭘 좀 아는 데? 그래 좋다, 결국 페어플레이를 할 수 있게 되었잖아. 서로가 미스터리 작가인 처지에 말야…

“말씀대로야. 자네에게 이런 장난이 통할 리 없지.”

“무엇 때문에 그 따위 걸 다 가지고 나왔어? 권총은 싫어했었잖아?”

“호신용으로 가져온 거야. 지금 난 별장에 가는 길이거든.”

권총을 주머니에 넣으면서 프랭클린이 말했다.

“지난번엔 미안했어.”

“무슨 소리야?”

“자네한테 여러모로 대들었던 일말이야.”

“아, 그거라면 이젠 잊어버리자고.”

“아냐. 그렇게 할 순 없어. 아무리 우리 사이지만 말이야.”

프랭클린은 왼손에 들고 있던 샴페인을 페리스를 향해서 내밀었다. 

“이것으로 화해하자구. 오늘은 이렇게 화해하고 싶어서 찾아 온 거야.”

그는 페리스의 몸을 밀쳐내듯이 하면서 방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아침 10시야. 벌써부터 샴페인을 마시다니 너무 한 거 아냐?”

난처한 듯한 페리스의 목소리가 뒤를 따랐다. 프랭클린은 개의치 않고 방구석에 있는 싱크대에서 두 개의 글라스를 찾아가지고 왔다.

“상관없잖아. 일요일이야.”

“하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난 지금 <에스콰이어>에 실을 우리들의 마지막 원고를…”

“줄거리는 벌써 완벽하게 돼 있잖아? 조금 전에 타이프 소리를 들으니 페이스도 최고던데? 도대체 자넨 너무 착실해서 틀렸어!”

프랭클린은 힘차게 샴페인을 따더니 페리스의 손에 글라스를 쥐어주고는 병을 내밀었다.

“건배! 두 사람의 이혼을 위해서…”

프랭클린의 글라스가 페리스의 것에 닿아 술이 넘쳐흐르듯이 출렁거렸다. 페리스의 얼굴에는 불유쾌한 표정이 완연했다.

“이혼이랄 건 없잖아!”

“아냐 아냐, 괜찮아. 그렇게까지 미안해 할 거 없어. 헤어지는 데에도 색다른 즐거움이 있는 법이니까. 다시는 군소리하지 않을게.”

프랭클린은 샴페인을 쭉 들이켜고 나서 방을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은 벽에 걸려 있는 하드커버용 책표지의 원화와 두 사람의 얼굴이 실린 타임지의 표지를 거쳐 미국 탐정작가협회상으로 받은 애드거 앨런 포우의 조상(彫像)을 지난 뒤 창가의 책꽂이에 꽂혀 있는 15권의 미스터리 소설 쪽으로 더듬어갔다.

“보라구. 모든 게 우리들의 귀여운 자식이야. 전부 해서 15권. 부수로는 500만부. 이만한 인기를 획득하게 해준 우리들의 명탐정 멜빌 부인에게 건배하자구!”

프랭클린은 아직도 줄지 않고 있는 페리스의 글라스에 다시 한번 샴페인을 따랐다.

“자, 우리 손에서 태어나서 우리 손에서 최후를 마치는 힐데가드 멜빌 부인의 명복을 빌며…”

페리스는 글라스를 황급히 입에서 떼더니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샴페인이 흘러넘쳐 책상 위로 흘렀다.

“제발 그만 좀 해둬. 자꾸 그러면 마치 내가 죄를 지은 것 같잖아. 몇 번씩이나 말했지만, 난 이제 미스터리에 질리고 말았어. 뭔가 좀 다른 걸 쓰고 싶어.”

“아, 그 얘긴 이제 그만해도 좋아. 어떻든 자네의 새 작품에 영광이 있기를 비네. 자네 같으면 틀림없이 좋은 작품을 쓸 수 있을 거라고 믿어.”

“그렇게 이해해 준다니 고마워.”

“아냐 아냐, 중요한 것은 팀이 아니라 우리의 우정이야. 그야 나로서는 사랑하는 멜빌 부인을 갑자기 떠나보내야 한다니 서운할 수밖에 없지만… 자네 열성은 내가 가장 잘 알아주고 있는 걸.”

프랭클린은 글라스를 내밀면서 활짝 웃었다.

“자, 영원히 변치 않을 우리 둘만의 영원한 우정을 위해서!”

“좋아!”

페리스는 안심한 듯이 글라스를 쭉 들이켰다.
프랭클린은 담배를 물고 라이터를 켜 불을 당기면서 창가로 다가갔다. 넓은 유리창 너머로 회색빛 로스앤젤레스 거리가 소리 없이 숨쉬고 있었다. 프랭클린은 페리스에 등을 돌린 채 손에 쥔 라이터를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창가에 놓았다.

“자, 이야긴 끝났다. 지금부터 자네를 유괴하겠어.”

프랭클린이 뒤돌아보면서 말했다. 페리스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별장에 자넬 초대하겠어. 그걸 손에 넣은 지가 6개월이 지났지만 남자 손님이라곤 아무도 받아본 적이 없어. 자네가 그 첫 번째인 셈이지.”

그는 싱긋 웃으면서 페리스를 눈짓으로 재촉했다. 페리스는 무척 난처한 표정으로 프랭클린을 돌아보았다.

“미안하지만 오늘은 아무래도 안 되겠어.”

“왜 그래?”

페리스는 손톱을 깨물면서 자기 책상의 타이프라이터 앞까지 걸어가서는 원고를 빼들었다.

“샌디에이고에 있잖아, 자네 별장은?”

“차로 가면 2, 3시간 거리야. 밤엔 돌아올 수 있어.”

페리스는 쓰다가 만 원고를 보고 있더니 이윽고는 안경을 벗어 닦기 시작했다.

“그래도… 오늘 밤엔 마누라와 함께 외식을 하기로 약속해버렸단 말이야.”

“그거야 뭐, 전화해서 일 때문에 아무래도 늦겠다고 하면 그만 아닌가. 자, 가자구. 때로는 좋은 공기 속에서 낚시라도 하지 않으면 머리가 굳어 버린다구.”

“그렇지만…”

페리스는 또 손톱을 깨물기 시작했다.

“답답한 친구 같으니라구. 그새 부인에게 발뒤꿈치를 꼼짝없이 잡힌 모양이구만. 그렇게 겁이 나나?”

“싱거운 소리 하지 마.”

“그렇다면 결심하라구! 오늘은 10년 동안 계속된 우리 관계가 허물어진 기념일이야. 그 동업자의 마지막 권유를 거절한 데서야 경우에 어긋나지 않겠나.”

페리스는 아직도 할 말이 더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프랭클린은 그의 심중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작품에 관한 일이라면 경우에 따라서는 뜻밖일 정도로 공격적이 되는 그였지만, 그 외에는 결국 프랭클린의 의사를 따라 왔었다.

이 정도라면 동의한 거나 다름없다는 듯이 페리스의 저고리를 들어 그에게 던져 주었다.

 

“특별히 가기 싫어서 그런 건 아냐. 타이밍은 마침 좋았어. 지금 쓰고 있는 것도 곧 끝날 참이었고.”

프랭클린의 차 앞에서 페리스는 아직도 들릴락 말락하는 소리로 변명을 하고 있었다.

“제목은 뭘로 정했지?”

“여러 모로 생각해 봤지만 그냥 단순히 <멜빌 부인 최후의 사건>으로 하는 게 어떨까 싶어.”

“그럴 듯한테? <최후의 멜빌 부인 사건>이라… 그것으로 끝난다고 생각하니 역시 감개무량하군. 독자 역시 섭섭한 기분일 거야.”

“하긴 그래.”

페리스의 얼굴이 그리 생각해서 그런지 약간 우울한 듯이 보였다. 그는 바로 이때다 하는 듯이 준비해 온 것을 안주머니에서 꺼냈다.

“그래서 생각난 건데 말야. 관계자에게 기념품이라도 나눠줄까 싶어. 실은 리스트를 만들어 봤거든. 어때, 한번 봐주지 않겠나?”

페리스는 그걸 받아 들고 안경을 꺼내 썼다. 그리고는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프랭클린을 바라보았다.

“뭐야, 이건? 모르는 이름뿐이잖아?”

“뭐라고?”

프랭클린은 한껏 놀란 듯한 제스처를 하면서 넷으로 접은 그 종이를 다시 받아 들었다.

“아, 내가 뭘 착각한 모양이군. 다른 리스트를 가져온 모양이야.”

“그렇게 서둘 건 없잖아? 내일이라도 사무실로 보내줘.”

이것으로 됐다.

프랭클린은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짓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담배를 물고 주머니를 자꾸만 뒤적이면서 말했다.

“아, 이런. 오늘은 정말 실수의 연속이군.”

“왜 그래?”

“사무실에서 라이터를 놓고 왔어.”

“그까짓 라이터 갖고 뭘 그래?”

“아냐. 그걸 갖고 있지 않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놓이지 않아. 가서 가져올게.”

“나도 같이 갈까?”

“아냐. 금방 갔다 올게.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어.”

프랭클린은 페리스의 대답도 듣지 않고 내처 뛰어갔다.

 

프랭클린은 자신이 지닌 열쇠로 사무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창가에 놓아두었던 라이터로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당기고 크게 숨을 들이마시면서 그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페리스의 책상 바로 정면 벽에 걸려 있는 명탐정 멜빌 부인의 초상화가 프랭클린을 향해서 미소를 보내고 있다. 그의 작품이 영화화되었을 때 멜빌 부인역을 맡았던 안젤라 란즈베리의 초상화였다.

프랭클린은 난폭한 손놀림으로 담배를 재떨이에 부벼 껐다. 그리고는 싱크대로 다가가 조금 전에 사용했던 글라스를 조심스럽게 씻어서 술병과 함께 치웠다.

“자, 좀 시끄럽더라도 참아 줘요, 멜빌 부인.”

프랭클린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우선 책꽂이에 꽂혀 있던 15권의 <멜빌 부인 시리즈>를 오른팔로 힘껏 내리쳤다. 책은 사무실 바닥에 보기 좋게 흩어졌다.

다음으로 그는 페리스와 자기 책상 위에 놓여 있던 것을 모조리 바닥에 쓸어 엎었다. 책상서랍을 빼내어 내용물을 쏟아 던졌다. 의자 2, 3개를 발로 걷어차서 쓰러뜨렸다. 서류함 속의 서류들을 엉망으로 흩어 놓았다. 벽에 나란히 걸려 있는 표지원화를 차례대로 떼서는 유리를 두들겨 부쉈다. 참고자료들을 책장 째 바닥에 쏟아 놓았다. 페리스가 애용하는 해골 탁상시계를 집어 들어서 힘껏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프랭클린의 이마에는 엷게 땀이 배어났다. 프랭클린은 수라장이 된 사무실 내부를 다시 한번 휘 돌아보았다.

그것은 예상한 대로 참담한 광경이었다. 프랭클린은 안주머니에서 페리스에게 보였던 페리스의 지문이 찍힌 그 리스트를 꺼내어 서류함 속에 가만히 찔러 넣었다.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이마의 땀을 닦으면서 마지막으로 사무실을 훑어 봤다. 멜빌 부인이 지금이라도 곧 떨어질 듯이 기울어진 채로 여전히 웃고 있었다.

“잘 있어요. 멜빌 부인.”

프랭클린은 그렇게 말하면서 문을 잠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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