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를 리뷰하려면 먼저 오마주로 사용된 고전 영화 몇 편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요......

일단 1927년작 "재즈 싱어"에 대해 간략하게 알아보겠습니다. 

 

"재즈 싱어"가 무성영화시대에 종지부를 찍게 만든, 영화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최초의 유성영화라는 건 다 아실겁니다. ("사랑은 비를 타고"에서도 언급되죠)   

 영화의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한 소년이 성직자인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혀 집을 나갑니다. 그는 노력끝에 자수성가하여 유명한 배우가 되죠. 오랜만에 옛집으로 돌아가자 어머니는 기뻐하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그를 무시하고 냉대합니다.

어느날, 그가 쇼를 준비하고 있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찾아옵니다. 아버지가 병에 걸려 임종을 앞에 두고 있는데, 마지막으로 아들의 노래를 듣고싶다고 해서 데리러 온 겁니다. 그는 당장이라도 집으로 달려가고 싶지만, 스텝이 외칩니다.

 "곧 당신차례다. 쇼에 나갈 준비를 하라." 

그는 괴로워하며 갈등하다가 결국 어머니를 뿌리치고 흑인분장을 한 채 의상을 입습니다. 그리고 무대에 서서 자신의 마음 속 한을 노래로 승화시켜 관객들의 찬사를 받습니다. 

 

https://youtu.be/yFaZOaLTkN0?t=4470   (귀찮으면 분장실 장면만 보시길)

(유튜브에 풀영상이 올라와 있습니다. 옛날 영화지만, 배우의 표정연기가 훌륭하네요)

 

 

후반부에 주인공이 흑인분장을 하고 노래하는 장면을 두고 최초의 '화이트 워싱'이다, 인종차별이 컸던 당시의 시대상황을 보여준다, 라고 말들 하는데 사실은 또 하나, 오페라 "팔리아치"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팔리아치(Pagliacci)"는 이탈리아 어로 "광대"를 뜻하는데, 루제로 레온카발로가 작곡한 오페라 제목입니다.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하면, (치정,불륜,복수 3단콤보의 막장 사랑과 전쟁의 원조)  

이탈리아의 시골마을을 떠도는 한 유랑극단의 단장 '카니오'는 광대(팔리아치)입니다. 그에게는 젊은 부인이 있는데, 어린고아였던 그녀를 카니오가 거두어 기르다 부부가 되었죠. 그래서 아내는 카니오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습니다.

아내는 마을 청년과 눈이 맞아 바람을 피게 되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카니오는 분노가 치밀지만, 이때 누군가 말합니다.

 "곧 마을 사람들이 쇼를 보러 올 시간이다. 의상을 입고 준비해라." 

그래서 카니오는 얼굴에 흰 분칠하고 광대옷을 입으며 노래를 부릅니다. 

이 곡이 바로 "의상을 입어라(Vesti la giubba)"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FKxguXXSFok  (꼭 보셔야 됨)

(광대라는 직업의 애환을 잘 그린 작품이죠. 역시 명곡은 시대를 초월한다능~)

 

 

그리고 뮤지컬영화 <사랑은 비를 타고>에서는 배우=광대(팔리아치)라는 소재를 아주 코믹하게 다루었습니다.

코즈모가 주인공을 위로하면서, 광대(팔리아치)를 언급하며 "사람들을 웃겨라(Make 'Em Laugh)" 라는 원맨쇼를 하는 장면입니다. 

https://youtu.be/SND3v0i9uhE?t=11  (도널드 오코너 넘 좋아~ ♡

 

모든 예술인들에겐 철칙이 있는데, (이미 잘 아시겠지만)  

1. 반드시 주어진 무대에 올라야 한다 (자의든 타의든 무조건 약속된 시간에 무대에 올라가지 않으면 자격없음),

2. 돈을 내고 즐기러 온 관객들에게 반드시 그 값어치를 해줘야 한다. (못하면 썩은 토마토 처맞고 조롱과 비웃음이라도 당해서 즐겁게 해줘야 함) 

3. 무대 위에서 자신의 역할이 끝날 때까지는, 절대 울면 안 된다 (역할(분칠or가면)이 지워지면 관객의 환상이 깨지므로)  

 

 

https://youtu.be/UGoXf09yfL8   2007년 조수미님의 데뷔20주년기념 파리 공연. (시간 나면 보세요)

당시 공연을 앞두고 조수미님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지만, 관객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공연을 강행했죠. 그렇게 아버지에게 바치는 마지막 노래까지 다 끝내고 나서야 눈물을 터트리는 진정한 예술광대 조수미님. 리스펙!!! 

 

 

 

이처럼 광대란 직업은 아주 강한 프로근성을 요구하는 극한직업입니다. 

코미디언의 경우, 어떤 상황에서도 남을 웃겨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으므로 더욱 가혹했다고 할까요. (옛날에는 광대가 천시받았을지언정 왕이든 귀족이든 가리지 않고 팩트폭행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직업이었죠. 단, 못 웃기면 쓸모없다고 모가지 댕강. 물론 지금은 천시하지 않지만 대신 '광대 공포증'이 있다능. ('존 게이시' 이 xxx!))  

또한 광대들이 무대 위에서 하는 말과 행동은 <직업에 충실한 것>으로 취급되죠. 

코미디언이나 랩퍼의 경우, 특정 인물을 비꼬기하는 것이 당연시되는데, 당사자는 보통 그것을 '쇼'로서 받아들이고 설령 불쾌하다 해도 중세시대 왕처럼 점잖게 넘기거나, 같은 방식으로 받아쳐야 한다는(배틀) 암묵적인 관행이 있습니다. 

 (당사자가 너무 화가 나면 무대위에 올라가서 싸다구를 날릴 수도 있지만, 지나치게 선을 넘는 경우가 아닌 이상은 "광대가 광대일 하는 건데 무슨 문제냐? 억울하면 똑같은 방법으로 받아쳐야지, 폭력을 쓰는 건 나쁘다(프로답지 못하다)"고 오히려 욕먹음.) 

 

근데 서양에서는 코미디언이라고 절대 직업비하를 하지 않는데, 우리나라는 코미디언하면 옛날부터 '무식해서 몸으로 웃긴다'는 편견이 깊게 박혀 있었죠. (일제와 군사독재시절이 길어서 말 한마디 잘못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수 있는지라, 풍자는 엄두도 못내던 시절이..) 우리나라에서 코미디란 풍자나 비꼬기보단 슬랩스틱이나 바보연기가 주류가 될 수밖에 없었는데, 코미디언분들이 연기를 너~무~ 잘했기 때문에 생긴 부작용과 편견이 많았죠. 

그래서 코미디언이란 이유만으로 비하당하는 일이 참 많았죠. (물론 지금은 아니고) 

https://www.youtube.com/watch?v=O9nz27vSaek 추억의 봉숭아 학당 (지금봐도 웃기네) 

 

 

 

 

 

그러니까...... 결국, 이 영화에서 <분칠or가면>매우 중요한 연극적 장치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마고 로비>는 처음으로 영화 촬영장에 갔을 때, <흰 분칠>을 덕지덕지 바르게 됩니다. 그리고 미친 눈물연기를 보여주며 연기력을 인정받죠. 감독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냐고 물으니, 집을 생각했다고 하죠. 

 

<조반 아데포> 역시 이 영화 속에서 '시드니 팔머'라는 역할을 연기하면서, 그 위에 <검은 분칠>을 합니다. 

 

<잭 콘래드>는 직접 분칠한 장면은 안나오지만, 분홍색 우비를 입고 흰 분칠한 사람들과 함께 노래를 하게 되니까.. 

 

<토비 맥과이어>는 아예 스스로 <흰 분칠>을 하는 모습을 노골적으로 보여주기까지 합니다. 

 이때 배경에 흐르는 음악이 모짜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의 '밤의 여왕의 아리아'인데요, 우리나라에서는 조수미님 덕에 유명한 곡이지만, '밤의 여왕'역이 어떤 역인지는 잘 모르는 분이 생각보다 많더라구요.  

https://www.youtube.com/watch?v=s7vJcUogrEI   (뛰어난 연기력으로 극찬받고 있는 디아나 담라우 버전으로 들어보시죠 ♡

따라서, 이 음악은 맥케이가 '밤의 여왕'이며, '악역'이라는 암시죠. (그리고 이 곡의 원제목 처럼 맥케이는 '지옥의 복수심에 내 마음이 끓어오르고 (Der Hölle Rache kocht in meinem Herzen) ㅆㅂ Kill them all~!)  

 

즉, 이 영화 속에서 <분칠or가면>을 한 사람들은 모두 <본인이 맡은 역할 위에 또 하나의 가면을 더 쓰고 '누군가'를 연기하고 있다>는 암시가 되겠습니다. 

 

 

물론 '누군가'는 과거의 헐리우드에서 잊혀져 간 인물들 중에 있습니다. 그리고 다들 짐작하시는대로  이야기는 유쾌하지 않은 결말이 대부분입니다. (뭐 다 아시겠지만) 

 그리고 어쩌면... '그때 그사람'의 실제 이야기에도 (우리가 아는 or 잘 모르는) '밤의 여왕'역할이 있었을 수도 있다는 얘기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또 어쩌면 혹시... 이 영화로 인해, 이제와서 새삼스레 '밤의 여왕'의 마음이 '지옥의 복수심으로 끓어오르게 될지도' 모르죠. 그래서 자기 자식에게 '네가 내 자식이라면 짜라스투로(감독)에게 복수하거라!'고 종용할지도 모를 일이고요. (글고보니 헐리우드에는 대대로 비슷한 직업을 갖는 경우도 꽤 있다죠..) 

 그럼에도 데이미언 셰젤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자칫 잘못되면 앞으로 헐리우드에서 제대로 된 작품을 못 만들게 될지도 모르는- 그래서 결국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게 될 수도 있는 <위험한 길>을- 알면서도 굽히지 않고 당당하게 걸어갔다는 얘기가 되겠죠... 

 

사실 헐리우드 출신 감독이 헐리우드를, 그것도 위대했던영화역사 태동의 시기'작심비판'하기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헐리우드는 말 그대로 영화산업의 모태이자, <아메리칸 진격의 거인>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스필버그나 카메론, 스콜세지 같은 거장이라면 이 영화보다 훨씬 더 훌륭하게 그 시절을 비판하는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겁니다. 단, 어디까지나 선을 넘지 않는 방식으로 품위있게.

 이 영화처럼 작심하고 똥칠하는 수준으로 만든다는 건 어림도 없죠.(물론 감독스타일 차이가 있기도 하지만)헐리우드에서 잔뼈가 굵으면 굵을 수록, 수 십 년간 동고동락하며 얽히고 설킨 이해관계 때문에 이 영화처럼 만들고 싶어도 못 만들거라는데 500원 겁니다. 그 독설가 타란티노 조차도 헐리우드의 과거를 다루는데 자신의 전매특허인 칼날을 얌전히 접었죠. (누구나 추억은 소중하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젊고 팔팔한 피를 가진  감독이 있었기에 감히 만들어질 수 있었다' 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라라랜드를 만든 것은, 이 영화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전 이 용기있는 젊은 감독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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