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에 이터널스를 보고왔습니다. 

그런데 첫 장면에서 나오는 영화의 설정을 설명하는 자막이 너무 빨리 지나갑니다. 뭐, 사전에 미리 설정을 이해하고 가신분들은 별 상관 없겠지만, 아닌 분들은 제대로 이해를 못했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차분하게 다시 이 영화의 기본설정을 복기하는 것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먼 옛날, 태고적 우주에 <셀레스티얼>이라는 거인 종족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고대의 천인(Ancient celestial being)이라 불리는데, 행성으로 구슬치기를 할 수 있을 만큼 무지막지하게 거대합니다.

그들은 빛의 형태인 <코스믹 에너지>를 이용하여, 별을 창조하고 파괴하며 탄생과 죽음을 순환하는 우주의 질서를 관장하는 '우주의 신’입니다. 지구를 창조한 것도  그들입니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초대 신족인 <티탄>을 우주적 존재로 확장한 캐릭터죠.)

 

 

이 영화에 등장하는 6개의 눈을 가진 붉은 거인 <아리솀>은 이 ‘셀레스티얼’ 중에 하나로, 인류를 지키는 <이터널스>와 인류를 파괴하는 <데비언츠>를 창조한 신입니다. 

<데비안츠>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간들을 잡아먹는 퓌톤, 히드라, 키메라 같은 괴수들을 모티브로 하는 존재입니다.

그럼 <이터널스>는 무엇을 모티브로 한 존재냐? 이 영화의 오프닝이 바로 그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 옛날,
레드환인께서 세상을 굽어살피실제
그 중 아름다운 이 땅을 어여삐 여기시어
자신의 아들딸을 내려보내시며
‘널리 지적 생명체를 이롭게 하라’ 하시니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도다

 

(찬송)

아름다운 지구에♬ 금수강산에♬ 강림천손 열 분이 터 잡으시고♬

홍익인간 뜻으로♬ 나라 세우니♬ 대대손손 훌륭한 이름이 남아♬

인간 사랑 세르시♬ 리더 에이잭♬ 못 말리는 드루이그♬ 

푸른 하늘 날아라 이카리스♬ 존나 빨라 마카리♬

순정마초 길가메시♬ 어른 될래 스프라이트♬

너 잘났다 킨고♬ 게이 파스토스♬ a 테나♬

역사는 흐른다♬

 

데비안츠로부터 인류를 보우하사
눈높이 교육을 더불어 펼치시매

뭇 사람들이 경배하며 따르니
마침내 밝은 신시(神市)가 열리도다

그 이름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으니

깨닫는 자가 복음을 전하리라

 

 

처음 이 영화를 홍보할 때, 주인공이 10명이나 된다고 해서 좀 의아했습니다. 아무래도 너무 많잖아요. 

물론 어벤져스도 숫자로 치면 더 많고 복잡하지만, 중요한 것은 어벤져스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벤져스의 히어로 대부분이 자신의 독립적인 솔로영화를 갖고 있고, 그것은 마블이 장장 10년에 걸친 계획에 의해 완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벤져스를 서사시(Saga)라고 부르는 것이고, 그 많은 히어로들이 한데 뭉쳐서 얽히고 지지고 볶는데도 인물의 행동이나 갈등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죠.

 

하지만 이터널스는 이제 첫 작품인데, 처음부터 대뜸 10명이나 되는 주인공들이 우르르 몰려나온다? 딱 봐도 보통 머리를 굴려서 될 일이 아니죠. 당연히 우려가 되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 우려는 제가 아니라, 제작진이 먼저 했겠죠. 

 

그렇게 고민고민하던 제작진은 문득 요즘 유행하는 한류를 접하게 되고, '비빔밥'이라는 진리를 발견하게 되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나라가 어떤 나랍니까? 음식 한가지를 가지고도 절대로 그냥 안먹습니다. 치킨만 해도 수 십가지가 되고, 요즘은 또 K-핫도그가 인기라죠? 감자튀김도 섞고 치즈도 넣고 소스도 몇가지나 되고 별의별짓을 다합니다. 심지어 식빵에도 옥수수를 섞고, 술도 쓰까 먹어요. 

비빔의 미학. 

그래, 이것이 정답이다! 여러분, 한류가 또 해냈습니다! 

그래서 제작진은 이 영화에 등장하는 10명의 이터널스 한명 한명에, 7천년 동안 지구에 존재했던 신화들과 역사 속 인물들의 설정을 왼손으로 비벼넣고 오른손으로 쓰까넣은 것입니다.

따라서 CJ는 지금 당장 '비비고- 이터널스 만두'를 출시해야합니다. 물들어 올때 노저어야죠. 

 

비비고 이터널스 만두 (골라먹는 재미가 있어요~)

 

사실 이 영화를 단순한 히어로 영화로서 (만들면, 감상하면) 굳이 인물이나 스토리 속에 숨어 있는 모티브를 (부여하지, 이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그러면 작품의 깊이가 떨어지죠. 

하지만 마블은 모티브를 신경꺼버리는 쉬운 길을 택하지 않았고(없었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활용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마블의 어벤져스 같은 히어로무비를 기대하고 간 관객들에게 난데없이, 

 

액션 히어로 + ω-신화√역사 + 다큐∑마요미 = 의 값을 구하시오. 

 

내가 영화보러 왔지 수능보러 왔냐?

 

이러니 관객들로서는 "이게 뭐지?" "지루하다" "장난하니?" 하며 썩은 토마토를 던질 수 밖에요.

너무나 많은 모티브 범벅이 되어버려서, 사전 지식이 없으면 제대로 그 의미를 소화하기 어려운 영화가 되어버린 겁니다. 게다가 그걸 풀어가는 방식도 너무 루즈했고요. 

그렇다면 왜 마블은 그런 선택을 했는가? 

 

 

<이터널스>는 그 태생부터가 <신화>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신화>라는 것은 각 문명마다 완전히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존재했던 문명의 영향을 받거나, 흡수하여 재창조되지요. 

 

대표적인 경우가 '수메르 신화'입니다. 수메르 문명은 기원전 5000년경에 최초로 발생한 인류 문명이며, 메소포타미아 문명 (아카드, 바빌로니아 등) 전반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옛 로마인들 또한 그리스의 신화를 자신들의 문화에 그대로 흡수하였습니다. 그래서 '제우스(그리스)'와 '쥬피터(로마)'는 이름만 다를 뿐, 같은 존재지요. 

 

그렇기에 다른 시대, 다른 나라의 신화지만, 각각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 서로 비슷한 능력이나 행적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문화에 따라 <반전 또는 약간의 변형>을 겪긴 하지만요.  

 

 

신화와 역사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숫자는 엄청나게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제작진은 그중에서 '어떤 캐릭터를 뽑아서 쓸 것인가'를 엄청 고민을 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뭐 원작이 있긴 하지만 원작을 그대로 따라하진 않을 테고, 저도 원작은 아몰랑) 

그 결과 이 영화는 상당히 복잡한 모티브를 품게 되었고, 등장인물들의 설정뿐만 아니라 영화의 스토리 속에까지 녹여내는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은 인물 분석때 다룰 예정입니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 이것을 관객에게 얼마나 납득시킬 수 있느냐, 하는 새로운 과제가 생겨나 버렸죠. 과제를 풀려다가 또 다른 과제를 만들어낸 겁니다. 

 

어벤져스의 대성공때문에 매너리즘에 빠진 것인가?

만두를 너무 많이 먹었나?

그럴수도 있고...

어벤져스의 공식을 따르지 않겠다는 제작진의 고집이 만들어낸 필연적 결과라고 보입니다.

 

결국 내가 옳았어..

 

그래서, '어벤져스'에게는 10년의 시간과 각각의 솔로무비가 있었지만, '이터널스'10명에게는 단 1편과 그 속에서 들이 함께 살아온 7천년의 신화와 역사가 바로 각각의 솔로무비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영화는 그것을 최대한 간결하게 표현하려고 노력했지만 아무래도 7천년의 역사에 10명이나 되는 인물들의 기본설정도 풀어놓다보니 줄이고 줄인게 그정도인 거죠.

 

하지만 문제는 그것만이 아닙니다. 

지구에서 7천년간 쌓아왔던 역사- <구약>을 이해함과 동시에, 

앞으로 일어날 방대한 이야기- <신약>도 동시에 펼쳐야 하는 거죠.

7천년동안의 행적도 설명해야되고, 헤어진 친구들도 찾으러 다녀야 하고, 적과 싸우고, 연애도 해야하고, 갈등하고, 해소하고, 웃었다가 울었다가, 복선깔고 회수하고, 액션도 뽀대나게, 스토리도 챙기고 등등 그 많은 일을 <단 1편>에 몰아 넣어야 합니다. 시간은 없는데, 할 일은 너무 많죠. 

 

 

그래서 저는 <어벤져스 시리즈>와 <이터널스 시리즈(?)>를 같은 선에서 비교하기는 조금 곤란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어벤져스'가 지구를 지키는 영웅들의 서사시- <Saga>였다면,

'이터널스'는 지구에 강림한 신들의 이야기- <神話>이기 때문입니다. 

 

어벤져스 시리즈가 각각의 히어로들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착실하게 쌓아올려서 마침내 장대한 성을 완성하는 이야기였다면, 이터널스 시리즈는 거꾸로 수천년 동안 쌓아서 완성해 놓은 거대한 성벽이 이미 존재하고있고, 우리는 그 벽돌을 하나씩 되짚어 들춰봐야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해야 하는 구조라는 거죠.

한마디로 이 영화는 처음부터 제작난이도가 엄청높았습니다. (케빈 파이기가 스스로 선택하긴 했지만)

 

 

그렇다면 두 마리의 토끼를 짊어지고 있는 이 영화를 어떻게 만들어야 좋을까요? 

무리하게 욕심을 부리기 보다는, 차라리 '서두'에 집중해야겠죠. 예를 들자면, '캡틴 아메리카 1편' 처럼. 

 

 

'어벤져스 시리즈'를 좋아하는 분들도 '캡틴 아메리카 1편'만 가지고는 높은 평가를 주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캡틴 아메리카 1편'은 어벤져스 시리즈를 위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하는 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마블이 계획한 장대한 이야기를 위해 꼭 거쳐야할 첫 번째 '관문'의 역할이었고,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만하면 선방했다고 보여집니다. 

 

 

클로이 자오에게 감독을 맡겨서 히어로 영화를 다큐같이 찍은 것도 아마 그래서가 아닐까 싶네요. 마블은 다 계획이 있었던 거죠. (근데 중국시장 겨냥해서 중국계 감독을 골랐는데, 중국입장에서는 웬수였다는 걸 몰랐다는게 안습)  

 

 

<이터널스>안에는 인류의 7천년 <신화 역사>가 등장인물과 스토리 곳곳에 숨어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비벼서 원조랑 다른 맛을 낸다능)

그렇다보니 너무나 많은 모티브들을 섞어놓아서 사전 지식이 없으면 제대로 그 의미를 소화하기가 버겁다는 것이 '이 영화의 큰 단점'입니다. 전 영화 보는 내내 등장인물과 숨은 스토리의 복선을 찾아서 끼워 맞춰가면서 보느라 머리가 아파서, 지루한데 지루함을 제대로 느낄 수 없는 아이러니를 느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것이 앞으로 펼쳐질 케빈 파이기의 빅피쳐의 코빼기를 맛 본 것이라면.. 앞으로가 기대가 된다 하겠습니다. 정말 계획대로(?) 잘만 풀린다면 새로운 히어로 영화의 역사를 쓸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동진 평론이 왜 선방했다고 하는지 알겠습니다. 온갖 복잡한 설정에 모든 것을 녹여낸다는 게 절대 쉽지 않은데, 잘 풀어낸 것만으로도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관객에게 즐거움을 주는 게 아니라, 두통을 주고, 돈까지 삥뜯는, 지루하고 불친절한 영화입니다.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보고 세 번 봐야 풀 수 있는 <미궁>같은 영화 입니다.

 

그래서 이제 전 '아리아드네'를 흉내내어 볼까합니다.

마침 우연이랄까... 제가 평소에 신화, 종교, 역사에 관심이 많다보니... 혼자서 사전을 뒤져가며 정보를 모으고 정리하는 게 취미였거든요.

(뭐, 제 페친이라면 제가 1인출판으로 '그리스로마신화'책을 냈다는 건 다 아실테니깐 안비밀~ ^^;;;)

 

그렇다보니 이 영화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좀 주제넘긴 하지만, 이 영화의 미궁에 빠져 헤매는 분이 계시다면, 제가 가진 실타래를 나눠드리고자 합니다. (간혹 실타래가 꼬이고 엉키더라도 너그러이 봐주십시오.) 

그럼 오프닝 편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스키터 데이비스(Skeeter Davis)의 'The End of the World'

 

Why does the sun go on shining?

태양은 왜 빛나는 걸까?

Why does the sea rush to shore?

바다는 왜 해변으로 몰려올까?

Don't they know it's the end of the world?

그들은 세상이 끝났다는 걸 모르는 걸까?

'Cause you don't love me any more

당신은 더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데

Why do the birds go on singing?

새들은 왜 노래하는 걸까?

Why do the stars glow above?

별들은 왜 빛나는 걸까?

Don't they know it's the end of the world?

그들은 세상이 끝났다는 걸 모르는 걸까?

It ended when I lost your love

당신의 사랑을 잃었을 때 세상은 끝나 버렸는데

I wake up in the morning and I wonder

아침에 일어나면 나는 궁금해져

Why everything's the same as it was

왜 모든 것은 그대로인지

I can't understand, no, I can't understand

전혀 이해할 수 없어

How life goes on the way it does

어떻게 삶은 계속되는지

Why does my heart go on beating?

심장은 왜 계속 뛰는 걸까?

Why do these eyes of mine cry?

눈에서는 왜 눈물이 흐를까?

Don't they know it's the end of the world?

그들은 세상이 끝났다는 걸 모르는 걸까?

It ended when you said goodbye

당신이 작별을 고했을 때 세상은 끝나 버렸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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