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1일 기미독립선언문을 낭독하였던 민족대표 33인.

그러나 그 중에 훗날 친일파로 돌아선 변절자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광복절이 건국절로 슬며시 바뀌고, 친일파 재산환수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독립운동가의 후손은 아직도 가난을 면치 못하는 현실- (소문에 의하면 이완용의 손자가 서울대 높은 사람이고 광화문 복원책임자도 관계가 있다던데)

일제시대 항일독립을 위하여 피눈물을 흘리신 조상들께서 이 사실을 아신다면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요. 

민족대표 33인은 30명으로 수정되어야 합니다.



박희도(朴熙道/1889~1951)

독립운동가.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 황해도 해주(海州) 출생.


1904년 평양의 숭실전문을 졸업한 후 서울의 감리교 협성신학교와 연희전문을 중퇴하고, 서울에 영신학교?중앙보육학교를 설립, 부교장을 지냈다.

1919년 3.1운동 때는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 간사로 있으면서, 그리스도교 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체포되어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신생활사(新生活社)를 설립하여 《신앙생활》의 주필로 독립사상과 신앙운동에 힘쓰다가 다시 체포되어 2년 동안 복역하였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잡지 《동광(東光)》의 주간으로 있으면서 변절하여 친일행위를 하다가

48년 반민특위(反民特委: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의하여 친일파로 체포되기도 하였다.






최린(崔麟/1878~1958)

독립운동가. 친일파. 호 고우(古友). 도호(道號) 여암(如庵). 창씨명 가야마[佳山麟]. 함남 함흥(咸興) 출생.

도필두(都必斗)에게서 한학을 배웠으며 18세 때 각지를 유람하였다. 불교에 귀의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902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 한국인의 모임인 일심회(一心會)에 가입하여 정부의 개혁을 추진하다가 발각되어 일본으로 피신하였다.

그 해 7월 귀국하여 외부주사(外部主事)를 지내고, 1904년 황실특파유학생으로 도쿄부립[東京府立] 제일중학에 입학, 일본유학생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었다.

1909년 메이지[明治]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이듬해 귀국, 11년 손병희(孫秉熙)의 권유로 천도교(天道敎)에 입교하였다.

이어 보성(普城)고등보통학교 교장에 취임하고,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항일구국운동에 투신하였다.

1918년 천도교 간부들과 독립운동방안을 논의,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천도교 교세확장에 힘쓰고, 27년 구미 30여 개국을 유람하였다.

그러나 그 후 1933년 말 대동방주의(大東方主義)를 내세우며 친일파로 변절, 34년 조선총독부 중추원참의(中樞院參議)가 되었고,

37년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每日新報)》 사장에 취임하였으며,

39년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 단장을 지내는 등 8.15광복 때까지 친일활동으로 일관하였다.

1950년 6.25전쟁 중 납북되었다.





정춘수[ 鄭春洙 ]

1875(고종 12)∼1951. 종교인.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명옥(明玉), 호는 청오(靑吾). 충청북도 청주 출신.

1904년 원산에서 선교사를 통해 세례를 받고 감리교에 입교한 뒤,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1911년 목사가 되었다.

그는 부흥회 집도에 특히 능력을 보였고, 원산의 교회에서 근무 중 1919년 3·1 운동을 맞았다.

정춘수는 그해 2월 경성부에서 오화영, 박희도의 권유를 받고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참가하기로 결정했다.

원산으로 돌아가 지역에서의 만세운동을 조직한 뒤 당일 기차편으로 상경했으나, 태화관 모임이 끝나고 관련자들이 체포된 뒤였기에 자수하여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 받고 복역했다.

출옥한 뒤 개성의 교회에서 근무하고 신간회에 참가했다.

그러나 1930년대에 이르러 동대문교회 담임목사를 맡는 등 서울에서 목회를 하던 중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전향서를 발표한 뒤부터는 친일 활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듬해 일제의 비호 아래 조선 감리교회의 수장인 감독으로 피선되었고 내선일체에 철저히 순응할 것을 요구했다.

이후 일본제국이 일으킨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에 적극적으로 협력했고, 감리교회가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할 때도 앞장서는 등 조선 개신교회의 대표적인 친일 인사로 꼽혔다.

개신교 내부의 사상 검사 단체로 일제 경찰과 결탁하여 신사참배를 독려한 총진회 회장, 전시 총동원 체제 건설을 위한 친일 단체들인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1941년),

그리고 친일 종교인 모임으로서 개신교 교인들의 지원병 참전을 부추긴 조선전시종교보국회 이사(1944년)를 지냈다.

심지어는 일본군을 위한 특별 기도, 애국 헌금과 무기 제조를 위한 철문과 교회종의 헌납 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동안에도 감리교 내부에서 반발이 많았던 정춘수의 이러한 친일 행적은 해방 이후 감리교의 재건파가 1947년 《감리교회 배신배족 교역자 행장기》를 발간함으로써 드러났고,

1949년에는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두 달간 구금되기도 했다.

감리교회 내에서 그의 친일 행적에 대한 거센 비판이 계속되자, 정춘수는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기보다는 당시 어쩔 수 없이 일제에 협력하는 체 했을 뿐이라고 변명했다.

1949년 명동성당에서 영세를 받고 천주교회로 개종했으며, 한국 전쟁 발발 후 고향에 피난해 있다가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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