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는 예전에 언니가 제게 선물한 것인데, 만화책으로서는 유일하게 1992년 퓰리처 상을 수상한 그야말로 '문학작품'입니다.


(아직도 만화책은 아이들을 망친다는 불량한 이미지를 떠올리는 보수적인 어른이 있다면 이 책을 읽게 한 뒤에 자기반성하는 모습을 보고싶을 정도로)




처음에는 그냥 재밌게 보기 시작했는데, 책을 다 읽고 나자 그 깊이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작가 아트 슈피겔만의 아버지인 블라덱 슈피겔만이 바로 이 책의 주인공인데, 2차대전때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이야기를 상당히 사실적으로, 일종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처럼 담담하게 풀어내고 있습니다.


현실을 마치 현실이 아닌 듯, 등장인물을 모두 동물로 희화하여 표현했음에도- 아니 오히려 그러했기 때문에 보는 내내,


그것이 현실임을 더욱 상기시켜주는 작용을 하여, 현실을 보는 것보다도 더욱 가슴이 씁쓸해지게 만듭니다.


(유대인은 쥐, 독일인은 고양이, 프랑스인은 개구리, 미국인은 개, 폴란드인은 돼지) 


이야기 첫 장면에 작가가 어릴때 아버지가 한 말이 참 인상적입니다.


친구들과 놀다가 넘어졌는데, 친구들이 자신을 도와주지 않고 그냥 가버리자 울며 집으로 간 그에게 아버지가 이렇게 말합니다.


"친구? 그 애들을 먹을 것을 주지 않고 한 곳에 가두어 놓으면 친구가 무엇인지 알게 될 거다."




그리고 한참 나중에 나온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 '피아니스트'를 보고 나니, 다시 이 책이 떠오르더군요.


2차대전, 유대인 학살,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 게다가 (우연이겠지만) 주인공의 이름도 비슷합니다. 


블라덱 슈피겔만, 블라디슬라프 스필만(애칭: 블라덱)


영화 피아니스트도 물론 대단한 작품이지만, 이 <쥐>또한 결코 '피아니스트'에 뒤지지 않는 작품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로만 폴란스키는 '영화'로, 아트 슈피겔만은 '만화'라는 각기 자신만의 장르를 선택해서 표현했을 뿐이지요. 


사실 유대인 학살이라는 내용은 지금까지 수없이 많이 다루어져 왔기 때문에 식상할 수도 있는 내용이죠.


하지만 로만 폴란스키는 라이언일병 구하기 처럼 엄청난 전쟁씬을 보여주지 않고도, 쉰들러 리스트처럼 엄청난 시체더미나 영웅을 내세우지 않고도, 훌륭한 전쟁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전쟁영화에서 전투씬 빼고, 영웅빼고, 대사도 웬만하면 최대한 빼면서, 2시간 동안 관객을 지루하지 않도록 전쟁의 참혹함과 '생존'의 고통과, 위대한 예술의 승화를 모두 담아낸 영화를 만들기란 정말 거장의 경지가 아니면 엄두도 못낼 일이죠.


영화에서 가장 멋진 장면은 역시 자신의 목숨을 건 독일군 장교앞에서의 피아노연주 장면이죠.


영화의 처음부터 피아노 치는 것말고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비리비리한 주인공, 그저 남의 도움을 받아가며 겨우겨우 목숨을 부지하는 주인공을 보며,


왜 그의 주위에서는 그를 계속 도와주고 어떻게든 살리려고 애쓸까? 얼마나 대단하기에? 전쟁중에 피아노 잘치는게 대수냐?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같은 민족임에도 나치에 아부하며 동족을 학대하는 게토의 파수꾼조차 스필만은 가스실 열차에 태우지 않고 어떻게든 살려주려는 이유가,  


독일군 장교로서 죽여야 할 유대인을 눈앞에 두고도 결코 죽이지 못하는 그 이유가- 바로 이 장면 하나로 다 설명이 됩니다.


여기서 뭐하고 있어?
넌 누구야?
내 말 이해 안돼?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저는...깡통을 따고 있었습니다
여기 살고 있나?
여기서 일하나?

아닙니다
그럼 무슨 일을 하나?
저는... 저는 피아니스트였습니다
피아니스트? 이리로 와


연주해 봐


여기서 숨어 지내나?
유태인? 어디에 숨어 있었나?

다락방에요
보여주게


음식은 좀 있나?

아무것도 모르는 일자무식한 인간조차, 예술의 위대한 힘을 느끼게 만드는 이 장면은 정말... 감동 그 자체죠.


그리고 이 연주하나로, 그가 살아남는 것 하나로, 이 영화가 말하는 모든 것이 설명이 되지요.


정말 훌륭한 영화입니다.




피아니스트를 보고 감동을 받으셨다면 <쥐>를 꼭 읽어보시기 권합니다.


겨우 두권이니 꼭 사서 읽은 뒤 아이들에게도 읽히고 꼭 집에 두시라고 강력히 추천하고 싶습니다. (절대 돈이 아깝다고 생각지 않으실 것임)



          

 (블라디슬로프 스필만)             (아트 슈피겔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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