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사고 최초 100시간의 기록이 한겨레에서 인터랙티브 뉴스로 제작되었습니다. 


* 내용은 아래 한겨레 뉴스 참고




<한겨레 뉴스>

[디지털 기획] 사월, 哀-세월호 최초 100시간의 기록


등록 : 2014.05.20 15:13
수정 : 2014.05.30 16:45



컨테이너들이 결박이 풀린 채 기울어 있다. 해경 제공




한겨레 디지털 기획 ‘사월, 哀-세월호 최초 100시간의 기록’ 인터랙티브 버전은  hani.co.kr/interactive/sewol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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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달아난 골든타임


1-1. 4월16일 / 오전8시49분 - 쿵…배가 갑자기 기울었다



16일 7시 8분, 세월호가 진도 해상교통관제센터(VTS)의 레이더에 떴다. 평소와 달리 (▶ 관련 기사 : “사고 5일 전엔 세월호-진도VTS 수차례 교신 확인”), 해당 해역을 관할하는 진도 관제센터에 진입을 신고하지 않은 채였다.

원래대로라면, ‘바다의 관제탑’인 진도 관제센터는 신고 없는 세월호를 바로 호출해야 한다. 관제센터는 배가 오가는 것을 살피고, 충돌이나 좌초 등의 위험을 감지하는 일을 한다. 세월호와 같은 대형여객선은 관제 우선순위 1순위다. 당시 해역에서 세월호의 승객 수는 가장 많았다. 배엔 수학여행을 떠난 경기 안산 단원고 학생 325명이 타고 있었다.

하지만 관제센터는“바빴다“.“160여척의 배를 직원 4명이” 보고 있었다. 관할 해역을 지나는 배가 급선회하거나 기울게 되면 자동으로 경보가 울리는 장비(지능형 해상교통시스템 ‘위험경보 분석장치’)가 있었지만, 나흘 전 고장난 상태였다. 세월호는, 누구도 지켜보지 않는 가운데 조류가 거센 맹골수로를 향해 빠르게 달려가고 있었다.

진도군 맹골도와 거차도 두 섬 사이 6㎞ 길이의 바닷길인 맹골수로는 가로폭(4.5㎞)이 좁아 유속이 최고 6.6노트(시속 12.2㎞/h)에 이른다. 홍수가 난 개울물이 콸콸 흘러내리는 속도다. 하지만 깊이가 30m로 깊은 편이고 암초도 없다는 장점 때문에, 인천-제주, 목포-제주를 오가는 선박들의 주요 항로이자, ‘변침’(선박들이 방향을 바꾸는 것) 장소였다.

당시 맹골수로를 향하던 3등 항해사 박한결(26)씨는 2012년부터 외항선을 2년 가량 몰고 세월호 항해사로 입사했다. 조타수 조준기(55)씨는 92년부터 원양어선 갑판원으로 일하다 지난해 11월 세월호의 키를 잡기 시작한 뱃사람이었다. 선박을 운전하는 조타실은 항해사가 지시하면, 조타수가 키를 직접 움직이는 2인 1조 체계다.

조 조타수는 서툴렀다. 지난해말엔 키를 너무 세게 돌리는 바람에 세월호의 원래 선장인 신아무개씨로부터 야단을 맞고 입출항시엔 키를 못 잡게 됐다. 평소 직원들과 사이도 좋지 않아, 곧 다른 배로 보내질 예정이었다. 박 항해사와 조 조타수는 이날 말싸움을 벌이기도 했다(검경 합동수사본부 진술 확보).

박 항해사는 전에 제주에서 인천으로 올라올 때 한차례 맹골수로를 운항한 경험이 있었다. 세월호가 복원성이 약하니, 5도 이상 변침하면 안된다는 교육도 평소 받았다. 배가 맹골수로를 거의 다 빠져나올 때쯤, 이준석(69) 세월호 임시선장은 3등 항해사 박씨에게 배를 맡기고 침실로 들어갔다. 자리를 뜨기 전, 우현 135도의 항로를 145도로 두 차례에 걸쳐 변침하라고 지시했다.

8시 48분, 배가 변침 지점에 이르자 박 항해사는 조 조타수에게 “1차 5도(135도→140도), 2차 5도(140도→145도) 변침하라”고 지시했다. 두번째 우현 조타 때, 배는 오른쪽으로 급격히 돌며 ‘쿵’ 소리가 났다. 살펴보니 8시 49분 12초에서 13초 사이, 단 1초만에 배는 10도가 돌았다. 보통 대형 여객선이 5도 도는 데 2분여가 걸리는 걸 감안하면, 급선회다.

박 항해사는 놀라 “포트, 포트(좌현을 뜻하는 항해용어)!”하고 외쳤다. 반대 방향으로 배를 돌려 균형을 회복하려는 시도였다. 조 조타수는 포트가 아니라‘반대’라는 우리말을 하는 것으로 알아듣고 배가 돌아가는 반대방향인 왼쪽으로 키를 돌렸으니, 결과적으로 지시가 잘못 전달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배는 계속해서 오른쪽으로 빠르게 돌았고, 원의 바깥쪽인 배 왼편이 30도 가량 넘어지다시피 수면과 가까워졌다(외방경사 현상). 느슨하게 묶인 화물까지 배 왼편에 급격하게 쏠려, 배는 다시 반듯하게 서지 못했다. 일등항해사와 선장을 비롯한 다른 선원들은 놀라서 조타실로 뛰어들어왔다.

객실에서는 사람과 물건이 왼쪽으로 구르며 뒤엉켰다. 소파(5층 라운지), 티비(4층 객실), 자판기(3층 복도) 등이 넘어지며 사람들을 덮쳤다. 어딘가에 찧어 머리에 피가 나고 입술이 찢어지고, 골절상을 입은 사람도 있었다. 식당에서는 끓는 물이 쏟아졌다. 창 밖에선 컨테이너들이 갑판으로 미끄러져나와 도미노처럼 툭, 툭 부딪치며 배 밖으로 풍덩풍덩 떨어지고 있었다. “엄마, 아빠를 외치는 학생들 비명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생존자 전영문(61)씨 증언) 수학여행의 설렘은 공포로 변했다.


1-2. 오전9시37분 - 탈출하라는 방송도 없이 선장 먼저 탈출

그러나 대처는 이해하기 어려울만큼 미숙했다. 선장은 무능했고, 기관부 승무원들과 갑판부 승무원, 서비스직 승무원들은 직무별로 따로 놀았다.

가장 빨랐던 것은 기관부 직원이었다. 기관장 박기호(54)씨는 24년 경력 중 13년을 청해진해운에서 일해 와 사정을 꿰뚫고 있었다. 8시 50분, 조타실에 있던 박 기관장은 기관실로 즉각 직통 전화를 걸어 탈출 지시를 내리고, 자신도 기관부 선실이 자리잡은 3층 복도로 이동했다. 배 가장 밑바닥 기관실에 있던 선원들은 3층으로 올라왔다. 이후 기관부 선원 7명은 3층 복도에서 탈출 준비를 하고 무전기를 든 채 대기했다.  

기관부 직원들이 탈출하던 이 시각, 수학여행을 인솔하던 단원고 교감은 학교에 상황을 보고하는 전화를 걸고 있었다. “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잖아도 전날부터 배가 크게 흔들려 불안했던 터였다.

1분 뒤인 8시 51분, 최덕하 학생이 119에 신고했다. 구조를 요청하는 세월호 최초의 신고는, 이렇게 선원도 선생님도 아닌 학생에 의해 이뤄졌다.

그러나 선장을 위시해 가장 분주했어야 할 갑판부는 굼떴다. 사고 뒤 5분여가 지난 8시 55분, 진도가 아닌 제주 관제센터에 구조 신호를 보낸 것은 선장이 아닌 강원식(42) 1등 항해사였다. “지금 배 넘어갑니다”라는 긴급한 타전과 달리, 승객들에게는 선내에 대기하라는 정반대의 방송을 내보냈다. 김영호(47) 2등 항해사는 서비스직 승무원을 총괄하는 양대홍(45) 사무장에게 선내 대기 방송을 명령한다. 양 사무장은 3층 안내데스크에 있는 강아무개 매니저에게 무전기로 안내방송을 지시했다. “승객들은 자리에 머물러 주시기 바랍니다.”


학생과 엄마의 카카오톡. 김성광 기자


학생들은 심각한 상황과 동떨어진 안내방송에 의문을 품었지만, 순순히 따랐다. “지하철도 그렇잖아. 안전하니까 좀만 있어달라고 했는데, 진짜로 좀 있었는데 죽었다고. 나간 사람들은 살고.”(고 김시연 양 촬영 동영상) “진짜 물 들어오면 우리 진짜 나가야돼. (제자리에 있으라는 방송이 나오자) 네.”(고 박수현 군 동영상)

교감선생님은 58분부터 선생님들을 지휘했으며, 안내방송에 따라 침착할 것을 주문했다.“방송에 귀를 주목하고”(8:59),“학생들에게도 침착하라고 독려문자 부탁, 움직이지 마시고”(9:00), “기다려야 할 듯 합니다, 침착하게 행동, 학생 카톡으로 인원 파악 부탁”(9:01) 이에 따라 선생님도“지금 상황 어떠냐”(9:03)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9:07)라고 지시(2-4반 단체카톡)했다.

학생들은 어른들의 말을 믿었다. 눈 앞에서 “컨테이너가 다 떨구어”지고(9:12), “바다가 창문 앞쪽”으로 다가서고(9:17), “전기가 나갔”어도(9:21), “수상 구조대인가 뭔가 오고 있”(9:23) 다고 믿었다. 하지만 점점 기울어지는 배는 불길한 예감을 드리웠다.“엄마, 내가 말 못 할까봐 보내놓는다. 사랑한다.”(9:27)“할머니 배가 한쪽으로 기울었어. 껌껌한 데서 난간을 붙잡고 있는데 나 죽을라나봐.“(9:34)

그러나, 믿을 수 없는 어른들이 키를 쥐고 있었다. 9시부터 경비정이 도착한 9시 35분까지, 갑판부 승무원들의 대응은 의문 투성이다.

사고 이후 처음 교신한 제주 관제센터는 9시 정각, 침몰에 대비해 승객들에게 구명조끼를 입히고 퇴선 준비를 하라고 지시한다. 이 때 1등 항해사는 “사람들 이동이 힘들다”는 대답을 내놓는다.

9시 18분, 둘라에이스 호가 사고해역 인근에 최초로 도착했다. 구조해 줄 상선이 주변에 있는데도 세월호는“사람이 좌우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라며 탈출 명령을 내리지 않고, 언제 해경이 오는지만 계속 물었다.

9시 23분, 진도 관제센터가 “구명조끼 착용하라고 방송하라”고 하자 “방송이 불가능하다”는 거짓말을 했다. 이어 24분~25분 “방송이 안되더라도 최대한 나가서 조치하라”“승객 탈출 최종 판단해서 빨리 결정하라”는 지시에는 답하지 않고“지금 탈출하면 구조할 수 있느냐”는 엉뚱한 질문을 한다.

9시 34분엔 침수한계선(2층 D데크 높이까지의 흘수)이 수면에 잠겼다. 배의 복원력이 돌아오지 않는 시점이다.

9시 35분, 세월호 가까이 접근한 해경 경비정123정이 고무보트를 보내자 지켜보고 있던 기관부 선원 7명이 나가 가장 먼저 구조(9시 39분)됐다. 이를 본 조타실에 있던 선원들도, 우르르 마저 탈출했다. 9시 37분 “좌현으로 탈출 시도”한다는 교신을 마지막으로, 선장과 선원들은 침몰하는 배를 버렸다.


해경 구명벌 투하 시도. 해경 제공


서비스직 승무원들은 이때까지도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지 못했다. 3층 안내데스크에서는 9시 30분 이후 추가 조치를 묻기 위해 계속해서 무전기로 연락을 했지만, 조타실은 무시했다. 생존자 한승석(39)씨는 “(안내데스크에 있던) 박지영씨가 열차례에 걸쳐 무전을 했지만 조타실에서 아무 대답이 없었다”고 증언했다. 함께 있던 매니저 강혜성씨는 일단 당황하는 학생들을 진정시키려고 방송을 했다. “배가 기울어져 위험하니 구조대가 올 때까지 대기하라.”선장도, 기관장도 없는 배에 안내방송은 9시 50분께까지 일곱 차례 이어졌다.

점점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자 고 박지영씨는 기울어진 배를 뛰어다니며 구명조끼를 구해 학생들에게 입혔다. 수영을 못하는 자신의 구명조끼는 없었다.“언니는요?”“승무원은 마지막이야.”


1-3. 오전9시48분 - “배 올라가 구조하라” 하지만 해경은…

배의 ‘콘트럴타워가 없는 상황’을 고려하지 못한 것이, 해경의 패착이었다. 해경은 침몰이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 정확한 상황과 승객 탈출 여부 등을 파악하고, 선장 등이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다고 생각되면 대신해 상황을 지휘해야 했다. 상황파악은 관제센터(목포해경 관할) 차원에서 1차적으로 이뤄졌어야 하는 일이지만, 진도 관제센터는 목포 해경에게 9시 6분 상황을 통보받고서야 세월호의 사고 소식을 안 처지였다. 게다가 지속적인 교신을 통해 상황을 파악하던 관제센터는 9시 25분께 승객 탈출 판단을 최종적으로 선장에게 ‘직접 판단하라’며 맡기는 결정적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해경이 상황파악보다‘무조건 출동’에 전념한 결과, 오히려 구조대의 발이 묶이는 비극을 낳았다. 사고 접수 즉시(8시 58분) 출동한 123정(해경 14명 탑승)은 경비정이었지, 구조 전문 인력이 아니었다. 8시 59분에 출동한 첫번째 헬기(B511)는 배에 투입되는 전문구조요원이 아니라, 항공구조사 2명만 데리고 출발했다. 9시 3분에는 목포 외 지역 해경 헬기들까지 사고 해역으로 집결시켰는데, 이 바람에 이후 특공대들의 사고해역으로의 이동수단이 없어지게 된다. 9시 10분엔 해경의 중앙구조본부가 가동되고, 헬기와 20척의 경비정이 출동을 시작했다.

경비정들이 닿기 전, 9시 18분께 사고해역에 최초로 지원 요청을 받은 인근 상선(유조선)인 둘라에이스호가 접근했다. 창 밖으로 보이는 빨간 유조선은 희망의 불빛 같았다. 배 안에서는 이 무렵부터“구조대가 왔다”는 카톡이 퍼져나갔다. 만약 승객들이 갑판에 있다가 구명조끼를 입고 뛰어내렸다면, 많은 사람들이 구조될 수 있었다.

하지만 승객들은 바다에 없었다. 배 안에서 기다렸기 때문이다. 둘라에이스 호의 선장은 의아했다. “누가 봐도 그 상황에는 뛰어내릴 상황이었어요.”배를 바로 옆에 가져다댈 수 없으니, 최대한 접근한 상황에서 뛰어내리는 사람을 위해 구명조끼와 보트를 준비하고 기다렸지만 사람이 거의 나오지 않았다. 둘라에이스 호는 9시 18분 “사람들이 탈출 안하면 ALONGSIDE(접안)할 수 없다” 9시 23분“바로 앞에 있는데 탈출하면 인명구조 바로 하겠다”고 세월호에 교신을 타전하며 재촉했지만, 세월호는 해경만 찾았다.

9시 35분께 도착한 해경 함정 123정은 세월호와 교신조차 하지 않은 채였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당장 눈앞에 보이는 승무원들부터 구조했다. 배에 있는 사람은 내리라는 퇴선방송을 했지만, 앞서 30분께 도착한 헬기(B511호) 소리 때문에 선내에 있는 사람들에겐 들리지 않았다. 이미 조타실의 승무원들이 하선한 상황에서 배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대피 방송을 하려면 누군가가 들어가야 했지만, 55도(9시 40분 기준) 이상 기울어진 배에 해경은 들어가지 않았다. 9시 48분과 58분~59분에 걸쳐 목포해양경찰서장은 직원이 배에 올라가 구조하라고 명령했으나, 123정은 “항공을 이용해 우현 상부 쪽에서 구조해야 할 것 같다”는 대답만 할 뿐 누구도 침몰 직전의 가파른 배로 올라가지 못했다.“헬기로 해난특수구조요원을 싣고 가서 선내까지 진입해서 안내방송도 하고 데리고 나왔어야”(심동보 전 해군제독) 했다는 안타까움이 나오는 대목이다.


배 우현 난간에 모여있던 40여명 물로 뛰어들어. 전남 어업지도선 촬영


학생들은 바깥으로 들리는 헬기소리를, 구조대가 온다는 안내방송을 믿었다. 9시 42~43분 오간 단원고 학생의 카톡 “배터리 단다고(닳는다고) 지피에스 켜놓고, 기다리래”(김OO) 을 보면 지피에스를 켜놓으면 구조대가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사이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9시 50분엔 배가 62.6도로 기운다. 선실로 쏟아지는 물을 피해 탈출을 선택한 사람들은 구조선들을 보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9시 52분까지 현장에 도착한 것은 123정과 헬기 두 대(B511,B512) 그리고 어선 6척. 이때 구조된 사람들은 갑판에 나가 있었거나, 선내 방송을 믿지 않고 탈출을 선택한 사람들이었다.

 

1-4. 오전10시17분 - 마지막 카톡, 그 뒤 응답이 없었다

9시 50분께, 배가 옆으로 누우며 왼쪽부터 물이 차오르자, 구조를 기다리던 이들조차 급박하게 대피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단원고 2학년생 생존자 75명 중 절반이 넘는 43명(1·2·6반 학생)이 배 왼편 객실에서 나왔다. 남윤철(2-6)교사, 고창석(체육·학생인권부장) 교사 등이 물이 차오르는 객실에서 출구로 학생들을 내보냈다. 마지막 학생을 올려보낸 순간 물살이 세지면서 남 교사는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갔다(김승재 군 증언). 많은 교사들이 학생들을 대피시키다 실종됐다. 교사들의 생존률(▶직군별 생존률 그래픽 참조)은 세월호 탑승자 직군 중 가장 낮다.

우현 갑판으로 먼저 올라가 있던 일부 승객들은 학생과 어린이들의 탈출을 도왔다. 옆으로 누워 버린 배에선 우현 출입문은 천장에 있고, 판판한 바닥이 잡을 것 없는 가파른 벽으로 변해버린 상태였다. 물은 빠르게 발목으로 감겨들고 있었다. 김홍경(58) 씨, 김성묵(37), 김동수(49) 씨 등은 소방호스나 커튼을 밧줄삼아 객실 안에 갇힌 학생들을 끌어올렸다. 사무장 양대홍씨가 부인에게 “통장의 돈은 애들 등록금으로 써라”고 마지막 말을 남기고 배 안으로 돌아간 것도 이 때였다.

마지막 ‘골든타임’이 사라지고 있었다. 서서히 들어오던 물이 갑자기 빠르게 차올랐다. 오른쪽 객실에 있던 학생들은 방송만 기다리다 갑자기 물이 불어난 순간에야 뒤늦게 위험을 알아차렸다. 안산 단원고 학생들의 카톡 기록 중, 배 안에 있다가 탈출을 시도해 살아남은 경우는 10시 2분(“96도 기울었대요. 아예 못 일어나요. 배 안이요. ㅠㅠ”)이 마지막이다.

10시를 넘겨서는 중앙 객실까지 유리 깨지는 소리가 들리며 물이 들이찼다. 3층 뱃머리(선수)를 통째로 쓰는 큰 플로어룸(다인실)의 경우,“순식간에 큰 방의 반이 (바닷물로)차버렸다”(생존자 이용주(70)씨 증언). 다인실에 있던 이씨는 구명조끼를 입은 덕분에 둥실 떠오른 채 창문으로 다가갔다. 구조 경비선이 보였다. 구명조끼에 달린 손전등을 흔들었다. 10시 6분, 해경이 다가와 창문을 깨고 몇몇 승객들을 꺼냈다.

배 안에서는 살아있다는 것을 알리는 카톡이 빗발쳤다.“저 지금 방 안에 살아있어요”(10:04)“저희 배에서 있어여”(10:09)“몰라요 구조해 준다는데”(10:13) 고 박수현 군은 구명조끼를 입은 학생들이 아직도 대기중인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10시 11분께 전송했다. 이때 박 군이 있던 4층 오른편 객실에는 아직 물이 차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 중 누구도 돌아오지 못했다.

안내데스크가 있는 3층 로비에서도 이무렵 대피를 지시한 것으로 보인다. 3층 로비엔 30여명의 사람들(학생 20여명 포함)이 배의 왼쪽 벽을 바닥삼아 쓸려내려와 있었고, 바닥이 되어버린 3층 선실 왼편 창문과 출입구로 시커먼 바닷물이 성큼성큼 차올랐다. 일부는 바닷물 속으로 잠수해 나가려고 뛰어내렸고, 일부는 물에 떠밀려가며 간신히 4층 출구 쪽으로 올라갔다. 침몰 직전인 10시 15분께, 승무원 박지영씨가 자체 판단해 퇴선 지시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전부 뛰어내리세요!”난간에 매달려 망설이던 사람들이 바다로 뛰어들었다. 생존자 전영문(61)씨는 고 박지영씨가“여기 있으면 안될 것 같아요. (바다로)뛰어내리세요. 밖에 구조대 있어요.”하고 말했다고 전했다.

10시 17분, “지금 더 기울어.”고 박아무개 학생이 세월호 안에서 짧게 ‘마지막 카톡’을 울려보냈다. 배가 108.1도로 완전히 뒤집어지며 모든 갑판과 난간이 물에 잠기던 순간이었다. 20분 전“엄마아빠 배가 많이 기울어졌어요, 보고싶어요 ㅠㅠ”하고 썼던 아이의 카톡은 여기서 끝났다. 물은 순식간에 가장 윗쪽인 우현 갑판까지 소용돌이치며 차올랐다.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배의 난간을 붙잡은 사람들을 구조선들이 다가가 건져냈다.

10시 21분. 세월호는 선수만 남긴 채 모습을 감췄다. 바다가 삼켜버린 세월호 주위를 떠다니던 학생 1명을 구조선이 끌어올렸다. 사라진 세월호가 내보낸 마지막 생존자였다.

 


#2.컨트롤타워 실종

 

2-1. 오전10시25분 - 현장파악 안된 부처들 우왕좌왕

<한겨레>가 사고 이후 정리한 ‘세월호 타임라인’을 보면, 보고 체계는 엉망이고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각 부처들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해경(해양수산부 관할) 외에 사고를 가장 먼저 접할 수 있었던 곳은 교육부다. 8시 50분 단원고 교감이 단원고에 사고 즉시 보고했기 때문이다. 단원고 쪽은 사고 40여분이 지난 9시 30분, 경기도 교육청 장학사에게 유선전화로 사고 보고를 했다고 주장한다.

교육부의 얘기는 다르다. 교육부 상황보고서를 보면, 교육부는 9시 25분께 “여객선 침몰 요청 인지”를 했다. 9시 35분 실무자 선에서 인천시 교육청에 연락해 “관내 수학여행중인 학교 현황을 파악하라”고 지시했다. 이때까지 해당 학교가 ‘경기도’ 안산시 단원고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얘기다.

해경이 청와대와 안전행정부, 군 합동참모본부에 상황보고를 한 지 10분 뒤인 9시 40분에야, 서남수 교육부 장관은 “수학여행 중인 학생 여객선이 침몰 중”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서 장관은 이후 서울시 교육청과 경기도 교육청에 수학여행 중인 학교 현황 파악을 지시한다. 경기도 교육청은 이때 처음 사고 소식을 알았다고 주장한다. 서울시 교육청이 “해경 확인 결과 (경기도) 단원고 학생만 탑승했다고 한다”고 교육부에 보고한 시각이 9시 46분. 가장 먼저 사고 소식을 알고 각 부처를 지원했어야 할 교육부가 ‘어느 학교가 수학여행을 갔는지’ 확인하는 데만 1시간이 걸리는 ‘삽질’을 했다. 덕분에 교육부의 사고대책본부 가동은 세월호가 사실상 침몰한 시각인 10시 17분(교육부 상황보고서 04/16)에서야 이뤄졌다. 국방부(9시 35분), 안전행정부(9시 40분), 해양수산부(1차 보고서에 10시 40분이라고 보고했다가 2차 보고서에서 9시 40분으로 정정)보다도 늦다.

재난·재해 발생 대응에 총괄 책임이 있는 안전행정부는 사고 30여분이 지난 9시 21분에 “뉴스 속보를 보고” 사고 소식을 알았다. 당시 강병규 안행부 장관은 경찰간부후보생 졸업식에 참석 중이었다. 강 장관은 9시 25분에 전화로 보고를 받고도 행사에 계속 참석해 기념사진까지 촬영한다. ‘구조중’이라는 해경 쪽의 보고를 받고 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는 반증이다.

이같은 ‘낙관적인 보고’는 사태 수습을 그르친 원인이다. 안행부가 9시 31분 청와대 국가안보실 산하 위기관리센터에 유선 보고도 아닌,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통해 보고한 것도 마찬가지로 낙관적인 내용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박 대통령이 “단 한 명의 인명피해도 없도록 구조에 최선을 다하라”는 자신만만한 지시를 내놨기 때문이다. 이 지시사항을 담은 보고서가 작성된 시점은 오전 10시다.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은 “박 대통령이 김장수 국가안보실장으로부터 즉각 보고를 받았다”고 강조했다. 대변인이 국가안보실을 거론한 발언과 9시 30분 해경이 팩스로 상황보고서를 청와대와 안행부, 군 합참본부 세 곳에 보낸 점을 고려하면, 청와대가 재난 상황시 안행부와 별도의 직보 체계를 통해 사고를 챙기는 구조였음은 명확하다. “9시 19분 해경이 청와대 국가안보실 종합상황실에 유선보고를 했다”는 주장의 사실 여부를 가리지 않더라도 말이다.

이때까지 차후 ‘사태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정홍원 국무총리는 보고 체계에 등장하지도 않는다. 총리실이 등장하는 것은, 사고가 거대한 재난으로 판명난 16일 밤부터다.

10시 25분. 청와대 대변인이 ‘단 한 명의 인명피해도 없도록’하라는 박 대통령의 지시를 전하기 위해 기자들을 불러놓았다. 같은 시각 이미 가라앉은 세월호 주변 바다에서 구명조끼를 입지 않고 떠내려가는 의식불명의 한 남학생을 전남도 어업지도선 단정이 건져 올렸다. 구명조끼를 양보하고 또 다른 친구를 구하기 위해 바다로 뛰어내렸던 정차웅 군은, 병원에 이송돼 심폐소생술을 실시했지만 12시 20분께 숨이 멎었다. 이후로 구조선은 바다에서 살아있는 단 한 명도 발견하지 못했다.

 

2-2. 오전10시45분 - 해경 특공대원들 헬기 못구해 민간어선 타고…

사고 현장에 출동해 배에 들어가 보지도 못한 해경의 123정은 실제로도 ‘구조대’가 아니다. 경비정, 즉 일종의 기동대다. 불난 집에 소방관이 아닌 단속반이 출동한 셈이다. 물에 빠진 사람들을 건져내는 정도는 할 수 있었겠지만, 상황 파악도 하지 않고 달려간 현장에서 맞닥뜨린 것은 사람들이 배에 ‘갇힌’ 재난이었다. 일단 보이는 배에서 나오는 사람(선원)들을 구하느라 초기 10여분을 보냈다. 그러자 세월호가 좌현부터 물이 차며 가라앉기 시작했다. 9시 48분 123정은 “현재 승객 절반 이상이 안에 갇혀서 못 나온답니다. 빨리 122 구조대(잠수 구조 인력)가 와서 구조해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타전한다.(▶ 관련 기사 : 해경, 승객 절반이상 갇힌것 알고도 선내진입 안했다) 54분엔 “현재 구조 방법은 항공을 이용해 우현 상부 쪽에서 구조해야 될 것 같습니다”라고 재차 말한다. 사실상 포기 선언이었다.

초기 선체진입에 실패했다면 즉각 잠수 인력을 투입해야 했다. 하지만 해경 특공대는 사고 해역에 즉각 출동이 어려웠다. 탈 헬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해경의 잠수 구조인력은 해양경찰 특공대(SSAT·각 지방 해경청 소속 총 126명), 122 구조대(SSRT·전국 17개 해양경찰서에 총 155명), 심해(70미터) 잠수를 전문으로 하는 특수구조단(부산에 11명) 셋으로 나뉜다.

가장 빨리 출동할 수 있었던 서해해경청 특공대원들은 오전 9시 30분께 전남 목포 삼학도 해경 전용부두에 모였다. 서해해경청 헬기 3기 중 사용 가능한 1기(B511호)가 이미 출동한 뒤였다. 결국 긴급수배한 전남지방경찰청 헬기를 얻어타느라 일부(7명)만 10시 25분에 출발했다. 10시 45분 서거차도 방파제에 내린 특공대원들은 민간 어선을 얻어타고 11시 15분에 사고 해역에 도착했다. 나머지 특공대원 18명은 오후 3시가 되어서야 진도 해역에 집결할 수 있었다. 타고 가던 경비정이 고장나 1시간 지연되는 통에 도착한 것은 오후 5시 5분이었다.

122 구조대는 버스를 타고 진도 팽목항으로 갔다. 어선과 경비정을 번갈아 타며 사고 해역에 도착한 시각은 11시 24분이었다.

좀 더 전문적인 잠수 장비를 갖춘 특수구조단은 본부가 부산에 있어 진도까지 이동이 더욱 멀었다. 김해공항에서 항공기를 타고 오니 낮 1시 42분이 됐다.

해경은 오전 11시 40분, 오후 1시, 3시, 6시에 입수 시도를 했지만 세월호에 부표를 다는 데 그쳤다.

해군은 어땠을까. 해군 해난구조대(SSU)가 출동 명령을 받은 시각은 9시 34분이다. 이들 1진이 진해 해군기지에서 헬기에 탑승한 시각은 10시 50분, 도착한 시각은 낮 12시 4분이었다. 출동 명령에서 실제 출동까지 1시간 16분이 걸렸다. 어처구니없게도 잠수 장비를 휴대하지 않은 채였다. 해군은 “해경에게서 지원 요청을 받을 당시 잠수 요원이 필요한 상황인지 몰랐다”고 해명했다. 장비는 뒤늦게 낮 2시 1분 수송 지원헬기가 싣고 공수에 나섰다.

가라앉은 선내에 에어포켓이 존재하더라도 차가운 바닷물(10~15도)에서 생존할 수 있는 시간은 1~6시간. 데드라인은 오후 4시였다. 해군이 최초로 바다에 가이드라인(‘하잠색’)을 설치한 것은 오후 6시에 이르러서였다. 그나마 6시 35분에는 해군의 수색작업이 잠정 중단된다. “탐색 구조를 주도하고 있는 해경에서 잠수 작업을 통제”하면서 해군이 설치한 가이드라인을 가지고 해경이 먼저 입수했기 때문이다. 잠수 작업의 주도권을 쥔 해경은 그러나 오후 6시 50분, 강한 조류로 수색을 중단했다. 그렇게 희망은 사라져 갔다.

 

2-3. 오전11시1분 - “전원 구조” 첫 오보…부처들 구조자 수 오락가락

사고를 총괄해야 할 강병규 안행부 장관은 소방방재청장과 함께 10시 9분 “현장 출동”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안행부가 본부인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 상황보고서 첫날의 기록이다. 서울에서 출발했다는 것인지, 진도 현장에 도착했다는 것인지 모호한 표현이다. 이주영 해수부 장관도 11시 10분 “현장 출동”이라고 기록돼 있다. 이를 바탕으로 일부 언론은 “강병규 안전행정부 장관은 10시 9분부터 진도 현장을 지휘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이 기록은, 각 정부 부처의 대응이 지탄을 받기 시작하면서 뒤집혔다. 자원한 민간 잠수사 윤아무개(특전예비군중대 소속)씨가 “사고 당일 12시 반께(이후 2시께로 정정) 팽목항에서 장관에게 격려사를 받느라 (잠수를 위한) 출항이 지연됐다”고 폭로한 이후다. 안행부는 “(12시 반에는) 강 장관은 인천에서 진도로 이동중이었다”고 해명했다. 해수부는 “이 장관은 김포공항에서 무안공항으로 이동중이었다”고 해명했다. 실제로 강 장관이 사고 해역에 도착한 것은 오후 1시 이후였다는 사실을 의도치 않게 대대적으로 홍보한 셈이 됐다.

장관들의 ‘현장 출동’은 엉터리 시간 기록 해프닝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오전 10시 이후 안행부·해수부·교육부 장관 등이 일제히 진도 현장을 방문하기로 결정했다. 소방방재청(119)이 구조 작업중인 해경과 ‘의전’ 실랑이를 벌이게 되는 이유다. 10시 34분, 소방방재청장과 안행부 장관이 내려온다는 소식을 들은 119 상황실은 아직 구조 작업이 한창인 해경에게 연락했다. “서거차도는 섬이라서 못 간다. 팽목항으로 중앙부처가 온다는데”라며 이미 구조돼 서거차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생존자들을 팽목항으로 이동시키라고 요구한다.

해경은 지금 진행중인 구조가 급하다는 이유로 무시했다. 그러자 재차 연락해, “중앙 정부에서 (팽목항에) 집결하고 있는데”라고 따진다. 물론 의료진이 집결하기에 팽목항이 유리한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구조 작업중인 해경에게 이동부터 재촉한 것은 ‘무리한 의전’ 때문이었다는 의혹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결국 해경은 당장 진행중이던 구조작업에 향해야 할 일손을 나눴다. 12시 35분에 89명의 구조자를 서거차도에서 팽목항으로 옮겼다. 안행부 장관이 도착하기 직전이었다.

전남도지사는 구조작업을 해야 할 소방 헬기를 도청으로 불러 탑승해 논란이 됐다.

전남도소방헬기 2호기는 전남소방항공대를 이륙한 뒤, 10시 40분께 전남도청에 들러 박준영 전남도지사를 태웠다. 2호기는 구조 작업에 참여하지 못했다. 사고해역 주변을 선회한 뒤 진도실내체육관 인근 운동장에 착륙했다. 박청웅 도 소방본부장은 “구조를 위해 현장에 갔지만, 당시 해경이 공중충돌과 구조혼선 등을 이유로 소방 헬기 사고해역 진입을 통제했다”고 해명했다. 

이에 앞서 광주소방헬기 역시 진도 사고 해역으로 가던 도중 전남도 소방본부에서 “전남도청을 경유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방향을 돌려 전남소방본부장과 전남도 행정부지사를 태운 뒤 10시 37분께 사고해역에 도착했다. 소방본부장은 재난사고 통제관으로 신속한 현장 지휘를 해야 하는 입장이라는 점에서 소방 헬기에 탑승할 수 있겠으나, 9시 30분께 출동지령을 받아 이미 영암까지 가고 있었던 헬기를 돌린 것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전원구조 오보 시간. 최민희 의원실 제공

‘전원 구조’ 오보도 재난이었다. 해경과 교육청, 안행부(중대본)를 비롯한 정부 부처의 헛발질과 언론의 속보 경쟁이 합쳐진 결과였다.

문화방송(MBC)은 11시 1분 최초로 ‘전원 구조’ 소식을 속보로 전한다. “현재 학교(단원고) 측은 학생들을 전원 구조했다고 밝혔습니다.”(기자 리포트) YTN과 채널A, TV조선 등이 속보로 받았다.

11시 9분, 경기도 교육청이 출입기자들에게 “전원 구조”를 문자로 공지했다. 재난 상황에서 정부 기관의 발표는 정부 공식 입장으로 간주될 수 있다. 경기도 교육청은 사태 해명을 위해 국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먼저 단원고 학교 관계자가 학생 전원구조 소식을 알려 왔고, 이후 기자들의 문의가 쇄도함에 따라 해경에 확인 전화를 거쳐(“11시 8분 : 단원고 교사, ‘목포 해경에 학생전원구조 사실여부 확인’ 전화”) 문자를 돌렸다고 주장했다.

이후 대다수 언론이 경기도 교육청의 발표를 받아 썼다. 재난 상황인만큼 정부 기관의 발표를 1차 텍스트로 삼는 것은 재난 보도의 기본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보도가 현장에서 확인된 보고를 반영해 수정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여전히 구조가 이뤄지고 있는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했던 MBC 목포 주재 기자는 “현장 상황은 다르다”고 전했다. 그러나 MBC의 정정보도는 에스비에스(SBS)가 가장 먼저 “전원 구조는 오보”라고 11시 19분 알린 때로부터 5분 뒤에야 이뤄졌다.

재난 주관 방송사인 한국방송(KBS)은 더 심각하다. SBS와 MBC가 모두 정정보도를 한 뒤인 11시 26분에 “전원 구조”라고 최초 보도했다. 사람들은 뉴스에서 들려오는 ‘전원 구조’ 소식에 안심하고 점심을 먹으러 갔다.

‘전원 구조’ 오보 못지 않은 것이 안행부(중대본)의 오락가락 집계다. 낮 12시 11분 브리핑에서 “179명이 구조됐고 선사 여직원 박지영씨가 사망했다”며 전원 구조가 사실이 아니라고 최초로 정정했다. 그런데 오후 2시 브리핑에서 구조자 수가 별안간 368명으로 늘었다. 이같은 혼선은 전원 구조까진 아니라도, 승선자의 상당수가 구조되었으며 앞으로 구조자가 더욱 늘어날 것으로 낙관하는 원인이 됐다.

사고 수습 초기 벌어진 집계 오류 및 오보의 원인을 두고 안행부, 교육부는 해경에게 책임을 떠밀고 있다. 안행부의 경우, 해경이 낮 1시에 중대본에 보내는 수시 상황보고서에 구조자 수를 370명으로 잘못 기재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해경의 잘못은 분명하다. 사실상 구조가 제대로 이뤄지고 있지 않은 상황인데도, 해경은 “162명 구조 완료”만 보고(11시 25분)했다. 낮 2시 30분까지 배 안에 갇힌 실종자에 대한 보고는 누락했다. 상황을 분명히 전달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이미 배가 침몰한 뒤에 갑작스럽게 370명으로 구조자가 늘어났는데도, 해경에게 확인 한번 해 보지 않고 공표한 중대본의 책임 또한 부정할 수 없다.

각 부처마다 각기 다른 구조자 수를 언론에 발표하고 서로 반박했다. 전원 구조니 아니니 실랑이도 벌어졌다. 이 와중에 각 부처 장관들이 속속 사고해역에 도착해 ‘의전’을 챙기기 시작했다. 구조 현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됐다.

그러나 이것은 앞으로 이어질 ‘카오스’의 시작에 불과했다.

 

2-4. 밤10시20분 - 사고 13시간만에 범정부대책본부 꾸려

16일 오후 2시 반. 전원 구조 철회 해프닝으로 언론과 국민의 관심이 모두 정부 대처에 집중됐다. 중대본의 ‘368명 구조’ 발표 역시 거짓으로 드러났다. 여론은 빠르게 악화했다. 중대본은 배에 몇명이 탑승했는지, 몇명이 구조됐는지도 몰랐다. 자신만만하던 중대본이 쏟아지는 기자들의 질문에 “확인하고 답변 드리겠다”만 수십 차례 반복하며 군색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청와대도 이 시점부터 공백을 보였다. 12시 이후 오후 5시 10분에 박근혜 대통령이 서울 종로 안행부 청사에 차려진 중대본 사무실을 찾을 때까지 청와대가 무엇을 했는지 아무런 기록도 없고, 공개도 하지 않고 있다. 짐작컨대 2시께 늘어난 구조자 수에 안도했다가, 거짓으로 드러나고 여론이 악화하자 대통령의 대응을 고민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대본을 방문하는 것도 이 때 고려된 안으로 보인다.

청와대가 침묵하는 동안 관료들의 ‘황당한’ 행보는 계속됐다.

강병규 안행부 장관은 진도에 도착한 지 2시간 10분만인 오후 3시 10분, 다시 허겁지겁 서울로 돌아가는 ‘엉뚱한’ 행보를 보였다. 중대본을 방문하는 박 대통령을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강 장관은 오후 5시 10분 서울 안행부 청사에 도착한 박근혜 대통령을 간발의 차로 놓쳤다. 안행부 2차관이 대신 박 대통령에게 브리핑을 했다.

서남수 교육부 장관은 현장에 남아 있다가, 오후 4시께 실종자 가족들이 있는 진도체육관 탁자에 있는 응급의료품을 치우고 컵라면을 먹었다. 집중 포화를 맞았다.

황당 행보의 정점은 청와대가 마무리했다. “학생들이 구명조끼를 입고 있었다는데, 그렇게 찾기 어렵습니까?” 중대본을 찾은 박근혜 대통령이 물었다. 학생들 대다수가 침몰한 배 안에 갇혀 있다는 사실이 뉴스를 통해 알려진 지 벌써 한참이 지난 후였는데도, 대통령은 상황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었다.


지난달 16일 진도체육관을 찾은 서남수 교육부장관이 응급의료팀이 쓰던 테이블을 치우고 컵라면을 먹고 있다. 사진 오마이뉴스 제공


오후 무렵 진도 실내체육관과 팽목항 현장에는, 전세버스를 대절해 낮 12시 10분 진도로 출발한 단원고 학부모들을 비롯해 피해자 가족들이 고속도로를 달려 속속 도착했다. 생각보다 적은 구조자 수에 절망했다. 상황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정부를 보고 좌절했다. 실종자도 구조됐다고 적힌 엉터리 구조자 명단을 들고 보이지 않는 아이를 찾아 근처 병원을 헤맨 학부모도 있었다. 사고 후 8시간이 흘렀는데도, 누가 구조되고 누가 실종됐는지조차 혼선을 빚는 정부에 대한 불신이 오후 5시께를 전후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안행부(중대본)는 책임 회피에 급급했다. 저녁 6시 30분, “앞으로 구조자 수는 해경(해양수산부 관할)에서 브리핑한다”며 공을 떠넘겼다. 이후 상황 설명을 위해 무대에 오른 해양수산부 관계자는 학부모들에게 멱살을 잡혔다.

안행부를 필두로 정부의 대응 난맥이 최고조에 달했다. 16일 밤 10시 20분, 세월호 사고 이후 처음으로 정홍원 국무총리가 긴급 투입됐다. 총리실 주재로 사고대책 장관회의가 열린 결과, 안행부 중심의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대신, 해수부 장관이 본부장을 맡는 ‘범정부사고대책본부’라는 ‘콘트롤 타워’가 새로 생겨났다. 사고 뒤 13시간만에 생긴 ‘콘트롤 타워’였다.

해경-해수부(범정부사고대책본부)에 무거운 책임을 넘긴 안행부 장관과 직원들은 이날밤 11시 50분, 중대본 상황실에서 치킨을 시켜먹었다. 사고 첫날은 이렇게 저물었다.

 


#3.애원이 분노로

 

3-1. 17일 / 새벽 - 해경 두차례 보도자료 “밤샘 구조중” 거짓말

“우리 아이를 살려주세요.” 밤이 깊어지면서 간절한 애원은 들끓는 분노로 변했다.

사고 첫날 가족들은 정부 관료들의 무능을 목도했다. 관료들은 탑승객 수는커녕 구조자 수도 파악하지 못하고 종일 우왕좌왕했다. 해경과 현장, 진도실내체육관을 연결해 상황을 알려주는 책임자도 없었다. 실종자 가족들은 누구를 붙잡고 물어야 할 지 몰랐다. 안행부나 해수부, 정부부처 어느 곳도 실종자 가족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선거를 앞둔 정치인들은 수행원과 기자들을 몰고 우르르 몰려왔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에어포켓’에 대한 희망은 어둠 속에서 질식해 가고 있었다. ‘배 안에 살아있다는 메시지가 왔다’는 확인할 수 없는 소문들은 애끓는 가족들의 가슴을 할퀴었다. 침몰 현장을 직접 다녀온 학부모가 대책위에서 “잠수부 몇 명만 있을 뿐 아무런 구조 작업도 하고 있지 않다”고 전하자 불신은 극에 달했다.

분노가 불길처럼 일어나던 17일 자정께, 정홍원 국무총리가 진도 실내체육관을 찾았다. 그러나 단원고 학부모 등 실종자 가족과 직접 대화하지 않았다. 기자들을 불러모아놓고 질문에 대답하고 자리를 떴다. “전시행정 하지 말고 빨리 구조하라.” 체육관을 나서는 정 총리에게 물병이 날아갔다.

 

정홍원 총리가 분노한 유가족에게 물병을 맞았다. 연합뉴스


상황 모면에 급급한 ‘거짓’ 발표는 불신을 가중시켰다.

해경은 17일 새벽 두 차례나 보도자료를 내며 “밤샘 구조중”이라고 강조했다. 거짓이었다. 17일 자정~1시께엔 조류 상황 등이 좋지 않아 입수조차 하지 못했다. 추후 상황보고서에서 드러난 사실이다. 뜬눈으로 밤을 지샌 가족들은 직접 현장을 봐야겠다며 팽목항으로 향했다. 구조작업을 요구하는 부모들의 울음 소리와 절규는 새벽 안개를 뜨겁게 갈랐다. 잠수할 수 없다면 산소라도 투입해 달라고 부르짖었다. 정부는 “새벽 6시에 잠수부를 투입했다(거짓)”, “지금 공기 주입작업 대기중이다(거짓)”, “낮까지 공기를 주입하겠다”, “예정된 공기 주입 작업이 오후 5시 30분으로 연기됐다” 등 갈팡질팡한 해명을 내놨다. 부모들의 불신과 분노를 부추겼다.


3-2. 오후4시20분 - 박 대통령 진도 방문…부모들 불만 쏟아내

각 정부 부처가 불협화음을 내는 가운데 이를 조율해야 할 청와대의 책임론이 비등해졌다. 사고 둘쨋날인 17일 오후 4시 20분 박근혜 대통령은 전격적으로 진도 실내체육관을 방문했다. 진도체육관에 상황실을 설치했다. 언론 보도 등을 바로 접할 수 있는 텔레비전도 놓아주기로 했다. “책임자를 엄벌하겠다”고도 말했다. 실종자 가족들은 대통령에게 기대는 물론 원성도 쏟아냈다. 하지만 현장의 분노는 전해지지 않았다. 박 대통령의 진도 체육관 방문 소식은 지상파 톱 뉴스로 다뤄졌지만, 실종자 가족들의 야유는 사라지고 박수치는 모습이 편집돼 나갔다. 정홍원 총리가 물세례를 받은 소식도 사라졌다.


실종자 가족이 구조 활동에 불만을 터뜨리며 대국민호소문을 발표하고 있다. 뉴시스



정부에 대한 불신은, 정부 보도를 그대로 받아쓰기하는 언론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산소가 투입되고 있다고? 전부 거짓말이야!” 한 학부모가 뉴스 보도를 큰 목소리로 비난했다. 곳곳에서 기자들이 멱살을 잡히거나 쫓겨났다. 9시 뉴스가 끝날 무렵인 오후 9시 50분, 성난 학부모들은 단원고 교장과 교사들을 진도 실내체육관 무대로 불러 올렸다. 교장과 교사들이 무릎을 꿇고 학부모들에게 사죄했다.

구조작업에 대한 부풀리기식 발표도 불만의 대상이었다. 17일부터 18일까지 해경은 20차례에 걸쳐 잠수를 시도했다. 하지만 세월호로 잠수할 수 있는 탐색 유도줄인 ‘가이드라인’을 조금씩 늘려가는 것 외에 이렇다할 진전이 없었다. 가이드라인은 1개 뿐이었다. 이 때문에 한번에 잠수할 수 있는 인원은 2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선체 진입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해경은 언론에는 “17일부터 18일 오전 9시까지 잠수요원 532명을 지속 투입했다”고 발표했다. 실제 투입 인원이 아닌 가용 인원 기준이었다. 이를 그대로 받은 언론은 ‘사상 최대의 구조작전’ 투의 보도를 쏟아냈다. 두번째 밤도 꼬박 뜬 눈으로 지샌 부모들은 더이상 정부도, 언론도 믿을 수 없었다.


3-3. 18일 / 오전8시55분 - 분노한 학부모들 대국민호소문

단원고 학부모 대책위는 사고 셋째날 아침이 밝자 대국민 호소문을 발표한다.

“2014년 4월 18일 현 시점에서 진행되는 행태가 너무 분한 나머지 국민들께 제 눈물을 머금고 호소하려 합니다. (…) 책임을 가지고 상황을 정확히 판단해주는 관계자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상황실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싶은건 지금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안인데, 누구 하나 책임지고 말하는 사람도, 지시를 내려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아이들은 ‘살려달라’고, 차가운 물 속에서 소리치고 있었을 겁니다. (…) 민간 잠수부 동원해 자원을 요청했지만 배도 못 띄우게 하고 진입을 아예 막았습니다. (…) 17일 어제 항의 끝에 겨우 현장을 방문했습니다. 인원은 채 200명도 안됐고, 헬기는 단 두 대. 배는 군함 두척, 경비정 2척, 특수부대 보트 6대, 민간구조대원 8명이 구조 작업을 했습니다. 9시 대한민국 재난본부에서는 인원 투입 555명, 헬기 121대, 배 169척으로 우리 아이들을 구출하고 있다고 거짓말 했습니다. 국민 여러분 이게 진정 대한민국 현실입니까?”

 


#4. 청와대로 가자

 

4-1. 18일 / 오전11시20분 - 중대본 “선체진입 성공” 거짓말

사고 셋째날. 정부는 여전히 무능했다. 중대본(안행부)과 구조작업 중인 해경, 범대본(해수부)이 각기 다른 주장을 했다. 이날 ‘선체 진입’을 둘러싼 각 부처의 입장 변화는 한 편의 블랙코미디다.

오전 10시 49분, 범대본은 “3개 이상의 루트(가이드라인)로 선체 진입을 시도중”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사실 1개 가이드라인만 설치됐고 2개는 설치중인 상황이었다. 가족들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거짓 발표였다. 하지만 언론은 ‘작업에 속도가 날 것’이라며 받아 썼다.

오전 11시 20분, 중대본이 “3층 식당까지 진입에 성공했고 공기 주입도 시작했다”며 ‘선체 진입 성공’을 발표했다. 잘못된 발표였다. 낮 1시에 중대본은 자신들의 발언이 잘못된 것 같다고 다시 확인하겠다고 알렸다.

낮 1시 18분, 범대본이 직접 나서서 중대본의 발표는 잘못됐다고 밝혔다. 1시 30분에는 해경도 중대본 발표를 반박했다. “선체 진입은 아니고 가이드라인을 설치하고 있다. 오전 11시 19분부터 공기를 주입중이다. 공기 주입하는 시간에는 잠수 작업을 할 수 없다.”

오후 3시 27분, 중대본은 “선내 진입에 실패했다”고 정정했다.

그러자 중대본을 비웃기라도 하듯 11분 뒤인 3시 38분, 해경이 주축이 된 민·관·군 합동구조팀에서 선내 진입에 첫 성공했다는 소식을 알려 왔다. 2층 화물칸에 14분 동안 진입했다가 나왔다는 것이다.

초미의 관심사였던 ‘선체 진입’을 두고 정부가 오락가락할 때, 정확한 사실을 보도했어야 할 언론은 정부 발표를 따라가기조차 바빴다. 중대본이 선체 진입은 사실이 아니라고 정정하고 있던 낮 1시 이후에도, KBS에선 “선체 진입” 속보가 계속 나왔다.

숱한 오보도 이날 나왔다. 이날 오전 민간인 자원 잠수부라고 주장하는 홍가혜씨가 “해경이 민간 잠수부들을 들여보내지 않고 있다”는 거짓 주장을 MBN이 그대로 인터뷰 보도했다가 파문이 일었다. 오후 4시에는 KBS 뉴스특보에서 “선내 엉켜 있는 시신이 다수 발견됐다”고 오보를 했다. 역시 사실이 아니었다(잠수부들이 시신을 확인한 것은 다음날인 19일 새벽 5시 35분이 처음이다).

오후 5시 16분, 김석진 안전행정부 대변인은 “혼선을 빚어 죄송하다”며 “앞으로 해경 브리핑이 공식 입장이다”라고 밝혔다. 안행부가 자신의 브리핑을 믿지 말라고 선언한 것은 사고 첫날 이후 두번째였다.

정홍원 국무총리가 이날 저녁 8시 다시 한번 교통 정리를 했다. 앞으로 발표는 범대본(본부장 해수부장관)으로 일원화하겠다고 밝혔다. 무려 사고 77시간이 지나 이뤄진 ‘브리핑 단일화’였다.


4-2. 19일 / 새벽5시35분 - 객실 사망자 확인…희망이 절망으로

사고 나흘째인 19일 새벽 4시. 마침내 가이드라인이 추가 설치돼 총 3개가 됐다. 잠수부들이 동시에 작업을 할 수 있어 비로소 속도가 붙었다. 최초 설치 뒤 58시간 만의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새벽 5시 35분, 민간잠수부가 객실 창문으로 사망자 3명을 확인했다. 가냘팠던 희망은 돌이킬 수 없는 절망과 체념으로 변했다. 오전 11시부터는 팽목항과 진도체육관에서 시신 발견시 신원 확인을 위한 DNA 샘플 채취 작업이 시작됐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들이 길게 줄을 섰다.


희생자 가족들이 20일 새벽 청와대 항의 방문에 나서기 위해 길을 나섰다. 김태형 기자

실종자 가족들을 답답하게 만든 것은 정부의 어설픈 구조작업과 믿을 수 없는 말들이었다. 왜 구조가 이처럼 더디냐는 가족들의 재촉에 뒤늦게 답하듯, 11시 37분 진도 체육관에서 잠수 촬영 영상이 공개됐다. 뿌옇고 탁한 시야 속에서 선체만 더듬다가 25분만에 올라오는 잠수사의 모습이었다. 요란한 구조작전 보도와 달리, 사고 사흘 동안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실종자 가족들은 사고 첫날부터 사고 해역을 밝힐 수 있는 오징어 채낚기 어선을 도입하자고 제안했다. 물 속에서 오랜 작업이 가능한 민간 잠수사 ‘머구리’ 투입도 제안했다. 오징어 채낚기 어선과 머구리는 사고 나흘째인 19일에야 도입이 결정됐다. 배가 더이상 가라앉지 않도록 하는 리프트백(공기주머니)도 달아달라고 요구했지만, 리프트백은 19일 11시에야 달았다.

“가족들이 구조방식을 먼저 제안하면 검토해 보겠다는 식이다.”실종자 가족들은 해경의 소극적인 구조 방식을 성토했다.  

19일 밤 11시 48분, 민관군 합동구조팀이 드디어 선내에 진입했다. 단원고생 3명의 시신을 수습했다. 학부모들의 분노가 불타오르는 도화선이 됐다. “사고 발생 닷새째가 되어서야 선내에 진입했다. 이제 더이상 정부를 못 믿겠다. 청와대 앞에서 드러눕자.”몇몇 학부모들이 벌떡 일어섰다. 17일 박근혜 대통령이 진도실내체육관을 찾았을 때, 실종자 가족들에게 했던 빠른 구조 약속을 지켜달라고 읍소하자는 것이었다.

새벽 2시께 청와대행 소식을 들은 정홍원 총리가 황급히 체육관을 찾았다. 제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정 총리는 자신의 차량에 다시 탔다. “애들은 꺼내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가족들이 총리가 탄 차를 둘러싸고 눈물을 쏟았다. 총리는 뒷자리에 앉아 눈을 감았다. 눈 감은 총리를 보며 가족들은 두시간 가량 그 자리를 지켰다. 새벽 5시까지 총리는 차에서 나오지 않았다.


4-3. 20일 / 새벽5시 - 구조 실망 부모들 “아이를 살려내라” 청와대로

일부 가족들은 총리와의 대화를 포기하고 청와대로 행진을 시작했다. 부슬비가 내리는 컴컴한 국도를 약 12킬로미터 걸었다. 각자 잃어버린 아이 이름을 목놓아 불렀다. “아이를 살려내라!”, “정부는 살인마다!” 쇳소리에선 울분이 녹아나왔다. 이 모습을 경찰은 동영상을 찍어 채증했다.

6시 30분, 진도대교 인근에서 경찰 3개 중대가 행진을 가로막았다. “내 딸이에요. 아이를 찾아주세요. 제발….” 휴대전화 속 아이 사진을 경찰에게 내밀며 한 아버지가 호소했다. “구조작업이 어렵다는 것을 알았으면 처음에 제대로 말해줬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 가족들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졌다. 우리 딸 얼굴이라도 알아볼 수 있도록 꺼내달라.” 또다른 실종된 아이의 엄마가 눈물을 흘렸다. 자식을 잃은 부모들은 9시 53분까지 그대로 눈물과 비에 젖어 갔다. 저지선을 형성한 여경들도 함께 울었다.

더이상 행진할 수 없었던 실종자 가족들은 10시 20분, 지친 몸을 이끌고 다시 진도 실내체육관으로 돌아갔다. 그 뒤 사복 차림으로 현장에서 가족들을 지켜보는 정보담당 형사의 수는 두배로(16.25명→33명) 늘었다. 세월호가 다시 돌아오지 못할 진도 해역으로 진입한 지 99시간 12분 만의 일이었다.

 

글 : 정유경 기자 edge@hani.co.kr, 이재훈 기자  
도움 : 목포/안관옥 기자, 노현웅 기자
영상 : 하니TV / PD 김도성, PD 이규호

 




출처 : Irene의 스크랩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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