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구의역, 세월호 그리고 97년생


- 한겨레신문  2016년 6월 1일 -





▲ 김의겸

한겨레신문 선임기자



1997년에 태어난 아이들은 존재 자체로 기쁨이고 위안이었다. 우리 어른들은 외환위기의 구렁텅이에 빠졌지만 갓난아이의 배냇짓에 시름을 덜고 다시 기어오를 힘을 얻었다. 그런데 우리가 아이들에게 돌려준 건 헤어나올 수 없는 수렁이다. 죽음보다 깊고 어두운 구덩이로 애들을 밀어넣고 있다.


구의역에서 몸이 부서진 김군도, 진도 앞바다 깊이 가라앉은 세월호 아이들도 모두 97년생이다. 열아홉 김군이 열일곱으로 그친 단원고 학생들보다 772일 더 살았을 뿐이다. 더 버텼을 뿐이다. ‘구의역 스크린도어 9-4 승강장’이라는 페이스북 추모 페이지에는 97년 동갑내기들의 얘기가 나온다. “저희도 4월16일에 수학여행을 갔어요. 원래 제주도를 가기로 결정했는데 날씨 때문에 다른 곳으로 갔어요. 날씨가 아니었으면….” 김군과 제일 가깝다는 박영민군은 “친구들이 부탁하면 항상 거절을 안 하고 뭐든지 도와주던 친구”라고 흐느낀다.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 사이로 여드름이 봉긋봉긋 피어 있다. 김군의 얼굴도 그러하리라. 열아홉번째 생일도 채 맞지 못했으니.


구의역은 땅 위의 세월호다. 돈을 좇느라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서울메트로는 조직을 쪼개고 또 쪼갰다. 정규직을 줄이기 위해서다. 위험한 일은 하청에 재하청이 이뤄졌다. 심지어 지하철 안전과는 무관한 광고회사에도 스크린도어를 맡겼다. 고상한 말로는 위험의 외주화이고 진실은 책임 떠넘기기다. 세월호는 거꾸로 쌓고 또 쌓았다. 20년이 다 된 낡은 배를 들여와서는 켜켜이 증축과 개축을 이어갔다. 돈 되는 승객을 더 싣기 위해서다. 배의 무게중심은 위로만 위로만 올라가서 맹골수도에서 방향을 틀자 속절없이 무너졌다. 지하철의 ‘2인1조’는 최소한의 안전장치였다. 그러나 돈 때문에 위험천만한 ‘1인’ 작업이 일상화됐다. 세월호의 평형수도 손대지 말아야 할 금기였다. 그러나 평형수는 덜 채우고 화물은 욕심껏 더 실었다.


마른 수건 쥐어짜듯 이윤을 추구하니, 위험한 일은 헐값에 부려먹을 수 있는 젊은이들에게 돌아갔다. 김군만 그런 게 아니었다. 국화꽃을 들고 구의역으로 온 김군의 고등학교 친구들도 대부분 비정규직이었다. 용접을 하고 유리를 다룬단다. 세월호 선장도 비정규직이었다. 월 270만원에 1년 계약직이었다. 97년 이후 우리는 젊은이들을 비정규직으로 내몰았고, 아이들의 안전을 비정규직에게 맡겼다.


김군의 엄마는 절규했다. “우리 아이가 잘못한 것은 밥 먹을 시간도 없이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배운 대로, 시킨 대로 했을 뿐이다”, “우리 아이를 기르면서 책임감 있고 반듯하라고 가르쳤다. 그렇게 키운 게 미칠 듯이, 미칠 듯이 후회가 된다”며 말을 잇지 못하기도 했다. 세월호 아이들도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에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어른들이 구해줄 거라는 믿음으로 배가 기울어도 물이 차올라도 배운 대로, 시킨 대로 따랐다. 한 단원고 여학생은 가라앉는 배 안에서 “엄마, 내가 말 못할까 봐 보내놓는다. 사랑한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살려달라’는 몸부림보다 훨씬 더 아파서 잊히지 않는다. 김군은 전동차와 부닥치는 순간 엄마를 떠올렸을까. 찰나에 생과 사가 갈려서 오히려 다행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97년생들을 잃어야 할까. 남자아이들은 곧 군대를 가기 시작할 텐데 또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하긴 뭐가 다르랴. 지금도 살아가는 게 전쟁인데 군대라고 얼마나 더 위험하랴 싶다. 김군도 세월호 아이들처럼 나비가 되어 하늘로 올라갈 것이다. 거기서 서로들 만나거든 맛있는 걸 나눠 먹기 바란다. 사발면 말고.



- 한겨레신문  김의겸 선임기자 -



<출처 :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4643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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