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 영웅 김영옥 <87> (밤의 행군5)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프랑스로 이어졌던 영옥의 불패신화는 한국에서 재현됐고, 이를 바탕으로 영옥은 중부전선에서 유엔군 3차 반격의 선봉장으로서 중부전선 60㎞ 북상의 주역이 됐다. 이는 한국 정부가 영옥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한 가장 중요한 공적이다.
 

 

 그러나 영옥의 대대는 연대본부의 지시대로 이른 아침 정해진 시각에 공격을 시작해 대체로 오전 중에 작전을 끝냈다.

 짧은 시간에 임무를 완수한다는 것은 그만큼 사상자가 적다는 의미였다. 사상자가 적을수록 병사들은 더 용감해지고 사상자가 적은 만큼 신병을 받을 필요도 없어 경험 있는 병사들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일찍 작전을 마쳤기 때문에 병사들은 다음날 작전을 앞두고 충분히 휴식을 취할 수도 있었다.

 어떤 고지를 점령하면 보통 다음 명령은 정면에 있는 두 고지 가운데 하나를 점령하라는 것이었다. 실제 어떤 명령이 떨어질지 몰라도 적어도 한 개에 대해서는 완벽히, 다른 한 개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작전을 짤 수 있었는데 대부분 명령은 예상대로 내려왔다.

 

 영옥은 그날 작전이 끝나면 항상 정보참모·중대장·포병연락장교까지 대동하고 평균 2시간씩 다음날 작전 지역을 관찰하고 실물과 지도를 비교해 공격 계획을 짜고는 포병이나 탱크부대와의 사전 협력까지 긴밀히 취해 뒀다.

 이 모든 것이 오후 2~3시쯤 이뤄지기 때문에 대낮에 모든 것을 육안으로 확인했고, 포병연락장교는 실험포격까지 마쳤다. 중화기중대장은 병사들에게 박격포나 기관총의 조준연습까지 시켰다. 오후 3~4시면 소대장들도 다음날 임무가 무엇인지 정확히 숙지했다.

 오후 6시쯤 영옥이 대대본부로 돌아가 저녁을 먹고 브리핑을 마치면 8시쯤 연대로부터 작전명령이 내려왔다. 일단 문서로 된 공식 명령을 받으면 이를 다시 분석하고 낮에 구두지시를 다 해 뒀어도 다시 모든 것을 문서화해야 했기 때문에 영옥 자신은 밤 12시가 넘어야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 전투를 수행할 중대장·소대장이나 병사들은 이미 모든 것을 숙지한 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영옥 자신은 하루 서너 시간 자기도 힘들었고, 그나마 비상전화로 잠에서 깨야 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전쟁터에서 책임 있는 지휘관이 되려면 개인시간이란 하루에 단 5분도 있을 수 없었다. (6.25때 찍은 사진 봤는데 얼굴이 너무 비쩍 말라 놀랄지경 )

 

 영옥의 리더십 아래 1대대는 완전히 면모를 일신해 구만산 전투, 탑골 전투, 청병산 전투, 수안산 전투를 연일 승리로 장식하면서 무적의 부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 시기는 유엔군이 6·25전쟁에서 중공군의 사실상 마지막 총공세로 남게 되는 제2차 춘계공세를 저지하는 데 성공한 후 총반격을 시작할 때였다. 유엔군의 이 총공세 역시 공산군에 대한 완전한 군사적 승리를 전제로 한 마지막 총공세였다.

 바로 이 시기에 영옥이 이끄는 1대대를 앞세운 미군 31연대는 중부전선에서 유엔군의 반격을 인도하는 견인차가 됐다. 유엔군은 5월 27일 전 전선에서 일제히 38선을 다시 넘었고, 영옥이 이끄는 1대대는 이때 38선을 가장 먼저 돌파한 유엔군 보병부대였다.

 밀고 밀리던 6·25전쟁에서 유엔군이 38선을 넘은 것은 세 번이었다. 첫 번째는 인천상륙작전 후 북진 때였고, 두 번째는 중공군의 참전에 따른 1·4후퇴 후 서울을 다시 빼앗겼다 수복하면서 취했던 방어적 공세 때였으며, 세 번째이자 마지막이 바로 이때였다.

 

 인천상륙작전 직후 처음 38선을 돌파할 때와 달리 유엔군은 두 번째나 세 번째 38선 돌파 때는 커다란 정치적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러나 영옥의 감회는 남달랐다. 아버지의 나라에서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에 군복을 다시 입던 순간, 이승만 대통령을 꼭 만나 보라던 어머니, 워싱턴의 해군 전략정보언어연구소에서 전투장교로 한국에 오겠다고 우기던 일, 한국으로 보내 달라고 싱글스 대령을 설득하던 밤, 도쿄 극동군사령부에서 한국어 시험에 일부러 떨어졌던 일, 부산역의 고아들, 소양강에서 무너져 내리는 한국군을 막던 다리, 겁에 질린 병사들을 독려하기 위해 목숨을 내놓고 걷던 청병산의 능선, 수안산 전투를 앞두고 단행한 밤의 행군 등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길지도 않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우여곡절을 거쳐 미군 대대를 이끌고 38선을 넘고 있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전쟁을 총지휘한 미 8군사령부는 그날그날 전황을 종합해 매일 전선지도를 새로 작성했다. 이 전선지도에는 군·군단·사단·여단·연대의 위치까지만 기록할 뿐 대대 위치까지는 전부 기록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1951년 5월 31일자 8군사령부 전선지도는 이날 현재 중부전선에서 가장 북쪽으로 진격해 있는 미군 31연대 1대대의 위치를 기록해 두고 있다.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프랑스로 이어졌던 영옥의 불패신화는 이렇게 한국에서 다시 재현되기 시작했다. 이를 바탕으로 영옥은 완곡한 U자의 밑 부분처럼 남으로 내려앉은 중부전선을 60㎞나 북상시켜 U자를 뒤집어 놓은 듯 오늘날 휴전선이 중부전선에서 북으로 돌출하게 하는 주역이 됐다. 이 공적은 훗날 6·25전쟁이 끝난 지 52년 만에 한국 정부가 “6·25전쟁과 관련해서는 어떠한 무공훈장도 새로 발급하지 않는다”는 오랜 방침에 대한 예외로 한국 최고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됐다.

 물론 이 공적은 당시 영옥과 함께 싸웠던 모든 한국군 및 유엔군 장병들, 이름 한 자 남기지 못하고 숨져간 무명용사들, 수많은 한국인들이 아직도 그 존재조차 모르는 민간인 노무부대원들이 함께 이룬 것이다.

 영옥이 미 육군 31연대 1대대를 이끌고 중부전선에서 가장 북쪽으로 진격해 있던 5월 31일 현재 미군 31연대의 인적 구성을 보면 미군이 3522명, 연락장교 6명과 한국군 카투사 466명을 합친 한국군이 472명, 최전선으로 탄약이나 식량을 운반하고 사상자를 후송했던 한국인 민간인 노무자가 500명, 한국인 유격대가 약 100명이었다.

 따라서 전체 약 4500명 가운데 미국인과 한국인의 비율은 대략 3:1이었다. 그러므로 이 시기 미군 31연대는 말이 미군이지 엄밀히 말하자면 한미연합군이었다.

 

 38선을 다시 넘은 유엔군은 계속 공세를 조였다. 31연대가 화천에 도착하면서 화천-김화 도로의 한쪽 끝이 유엔군 수중에 떨어지고, 유엔군이 김화를 향해 공격을 계속하자 중공군의 저항이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거세졌다.

 6·25전쟁 발발 당시 북한군도 평강-철원-김화로 연결되는 철의 삼각지대 통해 군대를 보내왔고 중공군이 춘계공세를 감행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반대로 유엔군도 평양으로 가려면 반드시 이곳을 먼저 손에 넣어야 했는데 공산군 입장에서는 이곳을 유엔군에 내 준다는 것은 다음 전투를 평양에서 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철의 삼각지대는 그만큼 중요한 전략 요충이었다. 유엔군 선봉으로 38선을 돌파한 영옥의 1대대는 화천을 거쳐 북으로 중공군을 계속 압박했다.
 

 

 

 

출처 : 국방일보 http://kookbang.dema.mil.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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