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학살


진실의길  강기석 칼럼


- 2016년 4월 4일 -





날이 밝으면 가톨릭계 신부를 맞아 결혼함으로써 오랜 박해의 두려움에서 헤어날 수 있게 된다는 들뜬 기쁨 속에 신랑 앙리 나바르를 비롯한 위그노(프랑스 내의 프로테스탄트)들은 늦은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바로 그 시간 신부 오빠 샤를 9세를 비롯한 가톨릭교도들은 결혼식 참석을 위해 전국에서 상경한 위그노 지도자들을 일거에 제거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누구를 죽일 것인가에 논의가 이르렀을 때 샤를 9세는 말했다. “짐이 원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 단 한 명이라도 살아남아서 내 책임을 묻지 않도록 모조리 참살하시오.” 

이튿날 1572년 8월 24일 새벽, 성당의 종소리가 울리는 것을 신호로 ‘바르톨로뮤의 대학살’은 시작되었다.


1948년 4·3사태 당시 남한의 치안 총책임자는 “전 섬(제주도)에 휘발유를 붓고 빨갱이는 모두 죽여도 좋다.”고 부르짖었다고 한다. 400년 가까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서도 종교나 이념이 다른 정치적 반대자들을 말살하고자 하는 광기는 신통하게 닮았다. 4·3사태 때는 특히 이념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양민들이 당시의 민병대라 할 수 있는 서북청년단 등에 의해 주민의 10분의 1이 넘는 3만 명이나 학살당했다.


동티모르에 대한 전투부대 파병 여부를 둘러싼 논란의 와중에서 4·3사태 관련 재판기록들이 새로 발견됐다는 소식이 곤혹스럽다. 우리가 이제는 인권수호자로 자처할 정도가 됐지만 우리 자신의 무자비한 양민학살 사건에 대해서는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역사에 부끄럽지 않은 공식 해석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섬뜩한 자각 때문이다.


재작년 8월 23일 파리에서 열린 세계가톨릭청소년대회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400년 전 ‘바르톨로뮤 대학살’에 가톨릭이 개입했음을 처음으로 인정하고 “과거의 잘못을 시인하는 것은 믿음이 굳세지도록 하는 정직하고 용기있는 행동”이라고 말했다. ‘4·3사태’는 누가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빌어야 억울한 넋의 한이 풀릴 것인가.




1999년 9월17일 경향신문 논설위원으로 재직 시 썼던 짧은 칼럼이다. 제목은 원래 ‘4. 3 항쟁’으로 붙이려 했으나 가치중립적인 ‘4. 3 사태’로 하자고 당시 논설주간과 타협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4. 3 학살이 맞는다. 몇 백 명의 무장대를 토벌한다며 수만 명의 민간인을 대량 학살했다.


‘4. 3 학살’은 엄연한 역사이므로 칼럼에 제주 학살의 내용이 지금 달라질 것은 없다. 단 하나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2003년 10월 31일 노무현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정부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빌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이래 어떤 대통령도 이 일로 제주를 찾지 않고 있다.








<출처 :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table=gs_kang&uid=44>




출처 : Irene의 스크랩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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